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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불가리아

불가리아 히치하이킹: '자카 데스테?' (여행 83일째)

2016년 10월 9일 일요일

이동경로: 롬치(Lomtsi) - 포포보(Popovo) - 롬 체르코브나(Lom Cherkovna) - 플레벤(Pleven)


걸었으면 일주일은 걸렸을 거리를 차를 얻어타서 하루만에 주파했다.


(오후 7시 무렵. 플레벤(Pleven) 언덕 위 파노라마 박물관 근처의 숲속)


1. 신나서 방방뛰고 난리칠 것 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아무 계획이나 염려 없이 여행을 시작한 것 치고는 매우 감사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나 똥을 싸고, 물로 씻은 다음 엉덩이를 수건으로 살짝 말리고, 옷을 갈아입은 후 짐을 쌌다. 짐이 진짜 별로 없구나... 옷이 좀 많은데 (부피의 절반 이상), 두껍고 무거운 옷들은 다 입고 있기 때문에 가방에는 침낭, 보조배낭(거의 사용 안함), 수건통, 일기장 2개와 서류더미, 케첩, 물통, 잡동사니 주머니 정도 밖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그레놀라를 커피에 말아먹고, 트레이시가 구운 쿠키를 먹고 (남은 빵이랑 케이크까지 들고 가고 싶어하는 이 욕심이여), 짐을 챙겨 나온다. 나오면서 폴에게 해먹을 다는데 쓸 쇠고리 2개를 가져가도 되냐고 물어보니,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트레이시와 폴 집에서의 마지막 아침.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싶은 풍경.


키티도 안녕.


정신 없으면서도 정겨운 주방 풍경.


2. 트레이시가 친구들을 만나러 차를 끌고 나가는 길에 포포보(Popovo)에 내려준다. 고요한 일요칠 아침의 동네를 어슬렁 어슬렁 한바퀴 둘러보는 척 조금 걷다가 길을 따라 마을 밖으로 걷는다. 그래, 조금씩 걸어가도 시간은 많고 어짜피 목적지도, 오늘까지 가야하는 곳도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니 마음이 급할 것 없이 편하다. 숲. 완만한 언덕과 들판. 농지. 햇살을 즐기며 서쪽으로 걷는다. 히치하이킹 하기에 완벽한 장소가 있어, 몇몇 차들에게 손을 내밀고 기다려 봤는데, 차를 잡아야 한다는 절실함도 없고, 굳이 히치하이킹 할 이유를 모르겠어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몇 킬로미터 정도) 걷고 있는데,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던 차 한대가 서더니 아저씨 한 분이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짓을 한다. 이게 왠 떡이냐. 


"자카 데스테?" (어디 가세요?) 라고 물어보니 아저씨가 뭐라고 말을 하시는데, 물론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다. 외워둔 여러 불가리아 구절이 있는데 기억이 안나서 "모제텔리..." 여기까지만 말하고, 그냥 차에 탄다. 서쪽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있는 도시들 이름을 쭉 읊어대자 아저씨가 알아서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내려 주신다. 그리고 저 방향으로 가면 된다고 알아 듣지 못하는 말로 설명해 주신다.


포포보 거리.




포포보의 시장. 일요일에는 쉬는지 장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차를 태워준 아저씨가 내려준 갈림길.


3. 호수 구경을 하는데, 호숫가의 조그만 배 옆에 파란 노끈 뭉치가 두 덩이 놓여있다. 마크라메, 해먹 고정에 쓸 수 있을 것 같아 탐이 났으나, 이건 남는 자원을 재활용 하는게 아니라 도둑질에 가깝다는 느낌에 그냥 두고 다시 길을 걷는다. 꽤 많이 걷고 나서야 마을에 도착한다. 


신기한 나무 물통.


커다란 쥐 시체가 있다.



집어가고 싶던 파란 노끈 뭉치.



목적지가 없어도, 걷는 것 자체가 좋아지는 길.


길가의 알수없는 물체.



가만 보면 먹는 건 배고파서가 아니라 심심해서일 때가 많다.


쓰레기더미 = 보물창고.


많은 아이템을 획득했다.


알수없는 동물의 반토막 시체.



좋다.






걷고 걷고 걷고...



4. 마을 이름은 롬 체르코브나(Lom Cherkovna). 중간에 한 번 얻어탄 덕에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만족스럽다. 조그만 마을에 들어서자 사람들 시선이 쏠린다. 아이들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 중에 집시(Romani) 꼬마 한명은 자전거를 타고 쫓아오며 이것저것 물어 본다. 마가진(가게)이 어디에 있냐고 꼬마 집시에게 물어보고, 가서 빵을 하나 산다. 썰려있는 식빵인데 가격은 0.7레바로 450원 정도. 점심준비가 되었으니, 마가진 앞의 테이블에 맘편히 앉아 빵을 먹으며 어제 만들던 해먹의 그물을 이어나간다. 


동네 청년들(20대 초반-10대 후반으로 보임)과 인사하고 햇살을 받으며 그물 뜨기. 어려보이는 청년들인데 차까지 갖고 있고, 내가 있는 쪽을 계속 힐끔힐끔 관심있게 쳐다보니, 차를 얻어탈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가 트럭 기사가 한명 슈퍼에 들렀다가 가고(태워 달라고 말을 걸까 했지만 입에서 '자카 데스테'가 멤돌기만 함), 또 다른 차가 슈퍼 앞에 서더니 사람 두 명이 내린다. 슈퍼에는 가지 않고 본인들이 챙겨온 빵을 먹는 두 남자. 흠... 어떻게 할지 눈치를 보다가 가방을 챙겨들고, 다가가서 "자카 데스테?"라고 5-60대로 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에게 묻는다. 나이 많은 남자가 "플레벤(Pleven)"이라고 대답한다. 딱 좋은 목적지다. 더듬 더듬 불가리아어로 태워달라고 말을 더듬고 있는데, 노인이 "두유 스픽 잉글리쉬?"하며 중년 남자를 가리킨다. 중년 남자는 영국인이었다. 차를 얻어타기로 하고, 차에다 짐을 싣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길을 따라 달린다. 운이 참 좋다.


중년의 영국 남자는 50살이라고 하고, 10년전 바르나(Varna)근처에 있는 집을 샀다고 한다. 그 당시는 영국도 유럽연합의 일부로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리아의 집을 사는 것이 쉬웠고, 가격도 말도 안되게 싸서(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400-500만원 정도에 샀다고 한 것 같다) 집을 본 적도 없는데 인터넷으로 구입했다고 한다. 그 후 4년만에 처음으로 구매한 집을 방문하고, 수리를 시작해서, 올해(2016년) 작업이 끝났다고 한다. 옆에서 운전을 하는 노인은 수리를 돕기 위해 고용한 사람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일했다고. 노인은 94년도부터 2004년까지 독일에서 건축을 하다 왔다고 한다. 영국 남자는 20살짜리 아들 얘기를 하며, 여행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여자친구'가 곧 아기를 낳는다는 얘기를 한다. 말을 계속 걸어 오지만 너무 작게 얘기해서 알아듣기가 좀 힘들었다.


둘 다 집시를 끔찍히 싫어한다.


영국 아저씨가 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걸어다니는 건 위험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마피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골에 무슨 마피아가 있을까 하고 웃어 넘겼는데, 차를 타고 가다가 길에 서 있는 여자를 가리킨다.


"저기봐! 저 여자는 창녀야. 그리고 창녀가 있는 곳에 마피아도 항상 같이 있어." 


여자가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길가에 밴이 한 대 서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다니고 있었는데, 실제로 위험한 상황을 마주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싸한 기분이 든다. 


롬 체르코브나의 염소.


마가진(가게) 앞에 앉아 빵을 먹으며 쉰다.


오늘 잘 곳이 있을지 모르기에 해먹을 열심히 만든다.


운좋게 차를 얻어탔음.


5. 플레벤에 도착해 헤어지면서 호두를 몇 개 받았다. 도시 중심부에서 와이파이를 찾아 카우치서핑 메시지를 몇 개 보냈지만 언제고 답장을 기다릴 수도 없어, 배낭을 메고 도시를 헤맨다. 어두워지는 도시의 광장. 돌아다니는 사람들. 해먹을 걸 만한 곳을 찾아본다. 그러다가 인적이 드문 공원 쪽으로 가서 언덕을 올라 박물관 근처로 향한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벗어나 누렇게 풀이 자란 공터로 들어가 보니 나무의 간격이 적당히 벌어져 있어 해먹을 걸기에 딱 좋은 곳이 보인다. 게다가 나무가 어느정도 있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시선도 차단할 수 있고, 뒤편의 박물관 건물 조명 때문에 완전히 으슥하지는 않다. 


아... 어두워지는군. 개 짖는 소리가 난다. 오늘 걷다가 주운 안전벨트와 가방끈 등으로 해먹을 설치한 후 그 위에 앉아 있다. 비가 안왔으면 좋겠다. 가방을 비닐 봉지로 감싸고 잘 준비를 한다.


플레벤 보행자 거리.



멋진 건물이 있다.


슈퍼마켓 전단지는 한국과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무지 싸다.


고인을 기리는 포스터.






풀과 넝쿨로 뒤덮여 있던 신비한 건물.




오늘 야영한 곳은 전망이 좋다. 이 풍경을 위해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이었던가.



해먹 설치중.


해먹 설치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