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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불가리아

불가리아: 해먹 캠핑과 카우치서핑 (여행 83-84일째)

2016년 10월 10일 월요일

불가리아 플레벤


0. (10월 10일 월요일 19:55)

아... 묵을 곳이 있다는 것은, 따뜻한 방과 침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땅의 냉기와 바람을 막아주고, 찬이슬과 빗방울을 막아주고,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로부터 해방되어, 씻을 곳과, 환한 조명과, 전기와 물, 인터넷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 축복받은 일인가. 


1. (10월 9일 있었던 일을 다음날 기록함)

어제 태워준 아저씨들이(영국 아저씨와 불가리아 할아버지) 플레벤 시티센터에 내려주고, 포도호두를 챙겨준다. 작별인사를 몇번이나 한 다음에야 헤어지고, 햇살이 아직 따뜻하게 남아있는 시티센터를 둘러본다. 센터몰(Center Mall)이라는 상가에 와이파이가 약하게 열려 있길래, 플레벤의 몇 안되는 호스트 중 하나에게 절박한 내용의 요청을 보내 놓고, 큰 기대없이 잠시 앉아 있다가 건물을 나온다. 여기저기 해먹을 걸어 볼 수 있을 만한 곳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광장의 나무들에 해먹을 걸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무리일 것 같다. 지도앱(maps.me)에 보이는 호수와 녹색이 많은 곳을 향해 가보자. 가는길에 음수대(drinking water)라고 표시되어 있는 곳을 찾아 가보니(어디를 가든 일단 식수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예전에 다보빅에서 헬프엑스를 할 때 플레밍과 함께 장작을 패러 가면서 들렀던 약수터처럼 물이 나오는 곳이 있다(해당 내용 링크). 하지만 물이 나오는 곳에 닿기 위해선 물속으로 들어가서 다리를 물에 담그고 물을 떠야 한다! 괴상한 구조에다가 물을 떠 마시는 사람도 없고, 고여있는 물을 뜰 수도 없어서 퍼즐을 풀듯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포기한다(다음날 아침 일찍, 그러니까 오늘 다시 가서 불빛을 비춰보니 고인 물에는 알수없는 생명체들이 우글우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음수대를 향해 오면서 지나쳤던 넓은 계단으로 돌아가 언덕 위의 석상과 탑을 향해 올라간다. 끝까지 올라가니 멋진 전망이 있고,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 와중에 자리를 깔고 누울만한 곳도 찾아본다. 끝까지 올라가니 숲으로 통하는 철문이 열려있다. '밤이 되면 이 문이 닫힐까?' 속으로 생각하며 어둑해지는 숲속길을 따라가보니, 동화속에서 나올 것 같은 예쁜 건물도 있고, 숲의 나무들도 신비롭다. 그리고 저 멀리 커다란 건물이 보이길래, 그 뒤편의 언덕에 올라가 보니, 개들을 끌고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영국 아저씨에게 받은 호두를 열심히 까먹으면서 걷는다. 호두 두 개를 한 주먹에 움켜쥐고 힘을 주면 둘 중 하나는 껍질이 깨진다. '마지막 하나는 어떻게 깨먹어야 하지?'라고 생각하며 호두를 까먹으며 걷는다. 다시 시티센터로 돌아가 와이파이를 잡아 답장이 왔는지 확인해 볼까 하는데,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노란 갈대밭과 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멋져 홀린 듯이 그 쪽을 향해 간다. 사람도 없고, 나무도 듬성듬성 나 있어서 캠핑하기 적당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아직 새로 만든 해먹을 테스트도 안해봤기 때문에 적당한 나무를 찾아 설치를 시작한다. 이날 히치하이킹을 하며 걷던 길에 쓰레기더미에서 주운 안전벨트와 가방끈을 유용하게 사용한다. 곧 해가 지고, 깜깜해지기 시작해서 마을에 다시 내려가 와이파이를 잡고 메시지 확인하는 것은 포기한다. 핸드폰도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신호 수신을 닫고 비행기 모드로 바꾼다. 그리고, 이제 해먹에 누워 잠을 청해보려 하지만 시간은 겨우 8시. 깜깜하지만 이른 시간이다. 잠은 오지 않고, 해먹은 생각처럼 편하지 않다. 그리고 기온이 내려가면서 체온도 점점 내려가는 것 같다. 명상하듯, 어둠 속에서(옆 박물관 건물에서 나오는 빛 덕분에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린다. 아마 죽음을 기다리는 기분, 땅속에 생매장 당해서 숨쉬고 있을 때의 기분이 이것과 조금 비슷하지 않을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채로(책을 읽을 수도, 핸드폰을 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린다. 한참 시간이 지나간 것 같은데도 시간을 확인해 보니 11시 50분... 그러다가 점점 더 추워져서 바지를 한 겹 더 껴입고, 비좁고 불편한 해먹 속에서 한참을 뒤척인다. 사람소리가 나면 움찔하고, 풀벌레 소리에 움찔하고... 그러다가 하늘에서 비가 뚝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얕게 들었던 잠에서 깬다. 아... 슬퍼라. 비에 젖지 않도록 후다닥 짐을 싸 나무 밑으로 가지만, 갈 곳도, 할 일도 없고, 몸은 춥다. 나무 아래의 벤치에서 비를 피하며 가방을 끌어 안고 앉아 날이 밝아지기를 기다린다. 춥다. 


2. (10월 10일 아침)

아직도 어두운 도시. 더 이상 기다림의 대상이 없는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숲에서 도시로 내려간다. 활기찬 전날의 오후와는 달리 이른 아침은 어딘가 침울한 느낌이 든다. 아침 일찍 나와 직장으로 향하는 듯한 사람들도, 어딘가 침울한 표정이다. 시티센터 광장에 앉아서 사람들이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는 것을 본다. 아... 그 자판기 네스카페 한 잔이 어찌나 따뜻하고 달콤해 보이던지... 자판기 커피는 0.3레브(약 200원)으로 빵값과 비슷하다. 이곳 물가를 생각하면 무지 비싸다는 생각에 한참 갈등을 하다가, 동전을 넣고, 자판기 버튼을 누른다. 아... 그런데 자판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건지, 커피가 제대로 안나오고 종이컵의 1/4 정도로 찔끔 나오고 만다. 옆에 있는 다른 기계에서 커피를 뽑을 걸 그랬다... 침통하게 조금 나온 커피를 마신다. 거들떠도 안보던 한국의 맥심 커피믹스가 떠오른다. 그땐 그 소중함을 몰랐다. 아직 문이 열리지 않은 센터몰 주변을 서성거리며 희미한 와이파이를 잡아보니, 카우치서핑 호스트에게 답장이 와 있다. 제라(Zehra)라는 터키 출신 여학생인데, 자기는 태국에 인턴십을 가 있지만 여동생이 호스트를 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이다. 감격의 순간...(오늘은 잘 곳이 있다!) 제라 동생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발칸 호텔 옆의 의대 건물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컨퍼런스를 하고 있었는데, 많은 학생들이 보인다. 불가리아 학생 말고도 유학생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나를 학생으로 생각하고 몇 명이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컨퍼런스 참가자를 위해 준비된 따뜻한 커피도 마시고, 화장실도 사용하고, 핸드폰도 충전하면서... 따뜻한 건물 안에 앉아 있으니 너무 좋다. 최고다. 역시 대학교가 좋구나.


3. 대학교 입구에서 제라의 여동생 부스(Buse)를 만나서 집으로 안내를 받는다. 제라부스는 터키 출신인데 둘 다 이곳 플레벤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다. 제라는 학년이 더 높아서 인턴 실습을 하러 태국에 가 있다고 한다. 덕분에 제라가 쓰던 방이 그대로 비어 있어, 그 방에 짐을 푼다.


4. 다음날에는 바로 데베타슈카 동굴(Devetashka Cave)로 향할 계획이었다. 카우치서핑에서 동굴 근처 마을 출신인 로라(Laura)라는 호스트를 찾았는데, 본인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마을에 살고 있는 사촌이 있다고 했다. 사촌이 오케이 해서 모든게 술술 풀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재워주기로 한 사촌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모든 일이 취소되어 버렸다. 동굴 구경은 커녕 내일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신세가 되었구나. 자, 어떻게 할까? 비오는 날씨에도, 불가리아어도 못하면서 히치하이킹을 할 것이냐, 아님 여기 더 빌붙을 것이냐, 아님 돈의 힘으로 버스를 타고 소피아로 전진할 것이냐... 집이 그립군. 그저 따뜻한 음식과 잘 곳만 있다면...



노숙한 다음날 차가운 아침. 세상 어떤 커피보다 맛있어 보이던 자판기 커피.


화창했던 전날 오후와는 다르게 우울하고 차가워 보이던 아침의 광장.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포스터.


배낭에는 잡동사니를 채우고 거지꼴로 돌아다닌다.


불가리아 동전들.


따뜻한 대학교 건물에서 쉬면서 카우치서핑 호스트를 기다린다.


천사같은 자매를 만나서 머물게 된 방. 맞은편은 동생 부스의 방이다.


돌아올 때 건물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사진을 찍었다.


머릿속은 내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해먹을 좀 더 만들다가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