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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투르게네프의 파우스트(Faust)

파우스트 박사와 메피스토펠레스

 

 

오전에 3시간 정도 대추야자 농장에 수도관을 설치하기 위해 땅을 파는 작업을 하고 나면 오후에는 산책이나 독서 등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에서는 가벼운 산책이나 독서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새로 읽을 것이 없나 해서 핸드폰을 뒤지다가 '투르게네프-파우스트.txt' 라는 파일을 발견했다. 별 생각없이 처음의 몇 페이지를 읽다가 결국에는 그 조그만 핸드폰 액정화면으로 끝까지 읽었다. 투르게네프의 '파우스트'는 책 속에 등장하는 책을 제목으로 삼은 책이다. 예를 들면 어떤 소설가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며 사랑을 싹틔우는 남녀에 관한 소설]을 쓰면서 그 소설의 이름을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지은 것과 비슷하다.

 

투르게네프의 파우스트에는 괴테의 파우스트가 등장한다. 나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어보기는 커녕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투르게네프의 파우스트는 술술 읽혔다. 내용 자체가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훈이 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깊은 감명을 받아서 그날 일기장에 통째로 옮겨 놓았다.

 

편지를 마치면서 이것만은 자네한테 말하고 싶네. 다른 것이 아니라, 지난 수년 간의 경험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확신을 얻었다네. 내 생활은 농담도 아니지만 오락도 아니다, 그렇다고 향락도 아니다... 생활이란건 괴로운 노동이다. 거부, 끊임없는 거부 - 바로 이것이 인생이 지니는 비밀의 의의며,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인 것이다. 가령, 아무리 고상한 것일지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상념이나 공상의 실행은 아니다. 오로지 의무의 수행 - 이거야말로 우리 인간이 주의해야 할 요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자기 몸에 쇠사슬이 없다면, 의무라는 쇠고리가 없다면, 인간은 인생 항로를 마지막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없을거야. 누구든지 젊을 때는 자유로울수록 좋다,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그만큼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겠지. 하긴 젊을 때라면 이런 사고방식도 허용될는지도 모르지만, 준엄한 진실의 얼굴이 드디어 자기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게 되었을 때, 거짓 감정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고 뭐겠나. 그럼, 안녕! 그전의 나라면 '부디 행복하기를'이라고 덧붙였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하기로 하겠네 - 생활에 노력하게.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슬플 때가 아니라 명상에 잠길 때면 이를 상기해 주겠나. 그리고 베라의 모습을 깨끗하고 순결한 그대로 자네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해 주기 바라네... 그럼, 다시 한 번 안녕!

 

자네의 P. B 로부터

 

이렇게 투르게네프의 파우스트를 읽은지 1년 반이 흐른 후, 동네 도서관에서 괴테의 파우스트를 발견했다.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을 만큼 분량도 상당한 데다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몇 번 펼쳐만 보고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책 속의 흥미로운 삽화와 인상적인 몇몇 구절들 때문에 욕심을 내어 결국 책을 읽게 되었다. 하지만 소화도 못할 것을 욕심 때문에 억지로 뱃속에 쑤셔 넣은 듯한 기분이다.

 

투르게네프의 파우스트에서 등장인물 베라는 주인공과 함께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으며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큰 충격을 받는다. 이 책은 베라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열정과 욕망을 일깨우고, 그로 인해 그녀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하지만 나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으며 베라가 느꼈던 그런 강렬한 기분은 느끼지 못했다.

 

파우스트에는 신과 악마의 내기, 정령과의 만남, 고뇌하는 박사, 악마와의 계약, 어린 소녀와의 사랑, 비극적 죽음, 마녀들의 축제, 차원 이동, 인조인간, 신화 속 인물들과의 만남, 변신, 전쟁 등 재미있을 만한 이야깃거리는 다 들어가 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그들의 고뇌와 갈망, 깐죽거림과 익살, 어리석음과 고귀함을 유쾌하게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투르게네프의 파우스트를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다. 물론 중간 중간 강한 인상을 받아 갈무리한 구절이 30군데 정도 있지만, 천재적인 시인의 일생의 역작을 읽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나마 작품해설을 두 번 읽으면서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했고, 괴테는 천재 나는 바보라는 사실도 납득하기로 했다. 

 

이 세계적인 명작에서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을 하고 싶다. 먼저 괴테는 시를 썼지만 (해설에 따르면 크니텔 시구, 블랑크 시구, 트리메타 시형, 알렉산드리너 시형, 마드리갈 시구, 민요조 등의 온갖 시 형식을 망라하고 있다고... 대체 무슨 소리인지) 독일어를 못하는 나는 시가 아닌 산문을 읽은 것과 같다. 그래서 시의 운율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하여가단심가를 좋아하지만 이 시들이 번역되어 얼마나 감동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두번째로는 (고전 작품들이 다 그렇지만) 작품이 쓰여진 시절인 200년전 독일에서의 상식과 21세기 한국인의 상식 사이의 괴리가 있다. 괴테가 아무리 당시 유명했던 사건과 사상과 인물에 대한 은유를 해봤자 나는 알 수가 없다. 199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200년 후의 슬로바키아 독자가 읽는다면 비슷한 기분을 느낄까? 

 

마지막으로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지식 부족이 있었다. 이 부분은 노력하면 어느정도 커버가 되는 부분이라서 나중에 성경과 그리스 고전을 열심히 공부한 후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으면 더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시리즈를 읽을 때에도 전체적인 흐름은 재미있게 따라가면서도, 등장하는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 미묘한 재미를 못 느꼈는데, 그것과 비슷하다.

 

어쨌든 시작했기에 끝은 봤다. 몇몇 인상적인 구절들은 가끔 꺼내 보기 위해 고이 저장해 두었다. 마음에 드는 삽화도 많이 발견했다. 무엇보다도 나중에 투르게네프의 파우스트를 다시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