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저자: 버트런드 러셀
역자: 최혁순
[1] 내용
- 사랑과 지식과 연민.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별이 빛나는 이유를 이해하고, 숫자라는 질서가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지배하게 해주는 피타고라스적인 힘을 파악하려고 노력(지식). 사랑과 지식이 나를 천상으로 인도한 반면, 인간에 대한 연민은 언제나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함. 비명소리, 굶주리는 아이들, 고문의 희생자, 자식에게 혐오스러운 짐이 된 노인, 고독, 빈곤, 고통으로 가득한 전 세계.
- 다양한 불행의 원인은 부분적으로는 사회체제에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개인의 심리에 있음. 개인의 심리라는 것이 상당한 부분 사회체제의 산물이기는 함.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를 말살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어떤 훌륭한 체제도 성공을 거둘 수 없음. 정작 부자들이 불행하다면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소설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 주인공의 허영심.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은 찾아볼 수 없고, 사랑을 통해 그 어떤 진정한 만족도 얻을 수 없음. 위대한 화가가 받는 인기에 마음에 혹해 미술을 공부할 수도 있지만, 그림 그리는 테크닉은 재미가 없고 그림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결과는 실패와 절망. 소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주인공 삼아 이상화하는 소설가도 마찬가지. 참된 성공은 그 일과 관련된 내용에 대한 진정한 관심에 달려 있음.
- 사람에 대한 우호. 다양한 관계가 자신의 흥미와 즐거움 모두를 충족시켜 줌. 격분할 정도로 신경에 거슬리는 특이한 성격도 그에게는 가벼운 재미의 원천이 됨. 스스로 행복하기 때문에 유쾌한 동반자가 됨.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함. 의무감에서 비롯된 자기희생은 일을 할 때는 유용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모욕적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남들이 자기를 좋아해주는 것이지, 속으로 앓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님. 많은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것이 개인적인 행복의 원천 중 가장 큰 것.
- 에피쿠로스는 뜻이 맞는 동료들과 더불어 지내고 축제일에 약간의 치즈로 보충하는 것 말고는 마른 빵만을 먹음으로써 행복을 추구했음.
- 활동을 하지 않고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활동이 과도하거나 불쾌한 것이면 역시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함. 바람직한 목표를 명확하게 지향하면서 그 자체로 본능에 거슬리지 않는 활동이라야 즐거운 것. 완전히 탈진할 때까지 토끼를 뒤쫓는 개는 그 시간 내내 행복하지만, 그 개를 쳇바퀴 위에 올려 놓고 반 시간 뒤에 훌륭한 식사를 하게 해준다면 그 개는 식사를 할 때까지 행복하지 않을 것임.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 사냥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거의 없음.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종사하는 일 밖에서 행복을 찾아야 함.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것은 창조적 충동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함. 하지만 실제로 몸을 움직이는 축구선수들의 만족감은 종류가 다름.
- 인간의 행복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생리적인 것에 달렸다. 불행한 사업가들이 철학을 바꾸기보다 매일 10킬로미터를 걸음으로써 행복을 더욱 키울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우연히도 이것은 토머스 제퍼슨의 견해이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개탄했다. 만약에 자동차의 출현을 예견할 수 있었다면 그는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 기하학을 가르쳐주는 형의 말: "공리들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나머지 것들을 증명하려면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거란다." 이 말에 내 희망은 무너져 나렸다. 나는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뭔가를 발견하면 대단히 신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증명할 수 없는 전제들을 통해서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 반론의 여지가 없는 명료함을 발견할 거라 기대한 영역에 대한 의심과 혼란이 남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은 큰 기쁨을 줌.
-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으로 이루어진 중심으로부터 세계를 바라봄. 한밤중의 촛불처럼 우리의 감각은 대상들이 멀어짐에 따라 점점 희미해짐. 우리는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시점에서 봐야 한다는 제약을 결코 벗어나지 못함. 과학은 이런 지리적이고 시간적인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시도. 물리학, 천문학, 역사학, 지리학 등은 우리를 지금과 여기로부터 벗어나게 해줌. 이런 학문들로 가득 찬 정신을 가진 인간은 동물적 욕망에 얽매여 있는 사람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보편성과 시야와 힘을 획득.
- 객관적 감정의 성장. 타인의 자녀들에 대한 애정보다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애정을 덜 가지고 있는 부모를 존경할 수는 없지만, 자기 자녀들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여 일반적인 자비심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존경해야 함. 영양실조가 될 정도로 음식에 무관심한 사람을 존경할 수는 없지만, 음식에 대한 자신의 욕구에서 출발하여 굶주림에 대한 연민으로 나아간 사람은 존경해야 함.
- 공포가 이성적인 행동을 고무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공포가 대중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 위험을 증대시키는 행동을 고무하는 경우는 매우 흔함. 위험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에서는 철학이 만들어 내야 하는 객관적인 감정이 최선의 치료제가 됨. 스피노자는 언제나 평온을 유지했으며 삶의 마지막 날에도 타인에 대한 다정한 관심을 잃지 않음. 개인적 삶을 넘어 희망과 소망을 폭넓게 확장시키는 사람은 그보다 더 제한적인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품는 것과 같은 공포에 시달리지 않음.
- 인간은 무한하고 충족되지 않는 욕망들을 가지고 있음. 굶주림을 벗어났음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게 만드는 소유욕, 경쟁심, 허영심, 권력욕.
- 우리의 정신적 기질은 심한 육체노동을 하는 생활에 맞춰져 있음. 젊었을 때 휴일을 온통 걷기로 보내곤 함. 하루에 40킬로미터를 걸었는데, 저녁이 되면 권태를 피하기 위한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음. 늘어지게 앉아서 쉬는 즐거움만으로 충분. 하지만 현대적인 생활은 이렇지 않음.
[2]
-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읽고 싶었지만 책이 너무 크고 두꺼워서 포기
- 도서관에서 저자의 다른 책을 발견해서 펼쳐본 후 가벼운 마음으로 대출
- 플라톤적인 영원한 세계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 믿음을 품고 내면의 여정을 시작. 그 세계에서 수학은 <신곡-천국편>의 마지막 시편들을 채우고 있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음. 하지만 영원한 세계라는 것이 하찮은 것이며, 수학이란 같은 대상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 다른 한편으로 사랑과 자유와 용기가 싸우지 않고도 세상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품고 내면의 여정을 시작. 하지만 전쟁(2차 세계대전)을 끝내 지지하게 됨. 이런 점에서 실패했음에도 여전히 승리인 것처럼 느껴지는 어떤 것을 의식하고 있음.
(질문) 반전주의에서 입장이 바뀌어 전쟁을 지지하게 된 것에 관한 자세한 글을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책이 끝날 때까지 그런 내용은 없었다. - 스토아 학파는 행복을 설파했던 에피쿠로스를 몇 세기 동안 공격.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돼지의 철학이라고 비하. 클레안테스(Cleanthes).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독교인 처형. 세네카는 네로 황제의 만행들을 사주하고 엄청난 재산을 축적함.
(질문) 스토아 학파인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글을 읽어 보면 그들의 뿌리가 소크라테스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글에서 다른 특정 사상을 공격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가 대립했다고는 하지만 두 학파의 궁극적인 목적은 동일하게 영혼의 치유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글을 읽어보면 어떻게 이런 글을 쓴 사람이 특정 종교인들을 학살할 수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철학을 실천했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세네카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훌륭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훌륭한 글을 남겼지만 그에 걸맞는 생활을 하지 못했고, 스스로도 그것에 대해 고뇌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저자가 스토아 학파에 대해 지나친 반감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 - 우리에게 혐오감을 주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음.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보려고 노력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천성에 폭력을 가한다면, 우리가 자연적으로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만 무뎌질 뿐임. 벼룩과 바퀴벌레도 마찬가지. 우리가 이런 생물들을 관조함으로써 즐거움을 얻으려면, 저 늙은 선원(시인 콜리지의 <늙은 선원의 노래> 주인공. 천신만고를 겪으며 남극에서 적도까지 표류한 뒤, 신이 만든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침)만큼이나 심한 고생을 해야 함. 어떤 성자는 그것들을 '신의 진주'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 사람들이 즐겼던 것은 자신의 성스러움을 과시할 기회였음.
(질문) 혐오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혐오스러운 것을 아름답게 보려고 노력함으로써 천성에 폭력을 가한다고 하는데, 많은 경우 혐오의 감정은 천성적으로 생기는 게 아니라 후천적인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생긴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혐오를 넘어서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보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성스러움을 과시하는 사람으로 깎아 내린다. - 자비심을 폭넓게 확장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 자비심조차 한계가 있음.
(질문) 그렇다면 자비심의 한계는 어디인가? 톨스토이의 철학과 대립되는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글 <사랑의 요구>에서 (그리고 또 다른 많은 글들을 통해서) 철저한 자기희생과 비폭력을 옹호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미 톨스토이의 비폭력주의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톨스토이와는 다르다며 선을 긋는다. 같은 이유로 2차 세계대전도 지지하게 된 것일까? - 철학은 개인의 삶에서 뭔가를 빼는 것이 아니라 더해야 함. 그의 욕망과 관심의 범위도 더 폭넓어야 함. 붓다는 단 한명의 중생이라도 고통을 받는 한 자신이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을 했음. 이것은 극단적인 지점까지 나아간 것이고 지나친 것일 테지만, 내가 말하고 있는 감정을 보편적으로 표현한 것임.
(질문) 여기서 다시 한 번 선을 긋는다. 붓다의 말과 자신의 말이 같은 뜻이라고 하면서도, 붓다의 말은 '극단적인' 지점이라며 지나치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버트런드 러셀의 촛불, 즉 그의 객관적 감정의 범위는 어디였을까? 보통 사람들처럼 나 자신이나 나의 가족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사람 전체? 자국민 전체? 유럽인 전체? 지구인 전체? 만약 범위가 그것보다 작다면, 어떻게 그것에 대해 변명할 수 있을까? 길에는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있는데, 자신은 가족과, 친구들과, 연인과 행복한 것을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었을까? - 악을 미워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악에게 일종의 속박을 당하는 것임. 그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은 증오가 아니라 이해를 통해서임. 그렇다고 내가 무저항을 옹호하는 것은 아님. 무저항이 악의 확산을 방지하는 데 효과적이려면 그것이 최고 수준의 이해와 더불어,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선한 것들을 손상하지 않는 최저 수준의 폭력과 결합되어야 함.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프랑스의 앙리 4세는 관용을 베풀면서도 무능하지 않았음. 에이브러햄 링컨은 지혜를 버리지 않고도 거대한 전쟁을 수행.
(질문) 무저항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논지가 몇 명의 전제군주와 거대 국가의 정치인이라니... 이 책 한 권만 가지고 저자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여러 훌륭한 말을 하다가 한 발자국씩 발을 빼는 모습이 비겁해 보인다. - 걷기에 관한 조언이 인상적이었음. 육체적인 활동에 대한 내 몸의 욕구를 인식함. 한시간에 한 번씩 팔굽혀펴기를 하고, 하루에 두세번씩 산책과 달리기를 해서 육체활동욕구를 풀기 시작했다.
- 스피노자
- 수학에 대한 희망과 절망. 그래도 수학은 계속 공부하자.
- 기쁨의 원천으로써의 사랑.
- 재밌게 읽었다.
- 인간의 욕망을 분류해 예시와 함께 정리해 놓은 글이 좋았다.
-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리해 놓은 부분도 좋았다.
- 죽음을 생각할 만큼 많은 고통을 겪어온 사람이 쓴 글이라는 아는 것이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글을 읽게 했다.
- 저자는 톨스토이, 간디, 소크라테스 등에 비해 제한적인 사랑의 범위를 가지고 있고, 희생보다는 전쟁을 옹호하는 입장인데, 그것에 대한 그의 솔직하고 구체적인 논리가 없어서 아쉬웠다. 서양철학사를 집필했을 만큼 박식하고, 수학을 좋아하는 만큼 논리적이고, 머리가 좋고, 경험이 많기 때문에 분명 그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른 책들을 읽게 되어 그 머릿속을 더 들여다 볼 기회가 생기면 수수께끼가 풀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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