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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우리의 타락, 공짜와의 결별, 돈의 시작 (Our Fall From Grace: Our Departure From Gratis: The Beginning of M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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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의 타락, 공짜와의 결별, 돈의 시작

글쓴이: 다니엘 수엘로

선교사와 교사와 의사가 왔기 때문에
더 많은 아이들이 생존했고 우리는 더 오래 살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굶주림의 위협을 받는다.
항상 사냥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는 없다.
사람은 너무 많고 사냥감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동냥해야 한다.
이건 아츄아(Achuar)족의 방식이 아니다.
백인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무기로 우리를 굴복시키지 않았지만,
책과 의약품으로 우리를 굴복시켰다.

(아츄아족 장로 [슈아르의 영혼: 아마존 마지막 자유인의 지혜, 143쪽])


백인의 삶은 노예의 삶이다.
그들은 도시와 농장의 죄수들이다.
우리들이 원하는 삶은 자유다.
백인들이 갖고 어떤 것도, 
그것이 집이든 철도든 옷이든 음식이든,
빈 땅에 들어가 살 권리보다 좋을 수는 없다.
왜 당신네 병사들에 의해 우리의 피가 흘렀는가?
[앉은 소(Sitting Bull)가 엄지로 땅에 네모를 그렸다]
자! 병사들은 우리 땅에 이런 표시를 그리고
우리에게 거기에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잘 먹이고, 병자를 고칠 의사를 보냈다.
그들은 우리에게 노동할 필요없이 살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이 구역을 벗어나면 안된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고기를 줬지만 자유를 빼앗았다.
백인은 우리가 원하는 많은 것들을 가졌지만,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유다.
나는 자유인이라는 특권을 포기하느니
천막에서 살며 사냥감이 없을 때는 굶겠다.
백인들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1882년 앉은 소[Tatanka Yotanka]가 기자 제임스 크릴[James Creel]에게 한 말)

1. 천국으로부터 불을 훔쳐오는 보편적인 신화에 대한 고찰

태양은 지구에게 결코 말하지 않았다.
'너 나한테 빚진거야'
이같은 사랑이 하는 일을 보라.
온 하늘을 환하게 비춘다.

-하피즈(Hafiz)

이 절망적인 빚과 불안의 상태는 어디서 왔는가?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우리는 완전한 불균형, 불평등, 불공평, 부정 속에서 살고 있는가? 어째서 자연 세계는 균형 속에 있지만 우리는 아닌가?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우리는 주변의 자연과 분리되고 우리 내부의 본성과 분리되었는가?

당신이 이 사이트를 보고 추측할 수 있듯이 나는 신화와 종교의 광팬이다. 나는 세계의 분리된 목격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그들의 목격담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의 목격담이 일치할 때, 나는 진리를 발견한다.

Hadza men hunt on a ridge above the Yaeda Valley in Tanzania. MATTHIEU PALEY (Source: www.sciencemag.org)

The Hadza

2. 최초의 풍요 사회

예로부터 지금까지 현대 사람들은, 원시 인류가 생존을 위해 쉴새없이 분투하고 여가 시간은 거의 갖지 못했을 거라는 오해를 해왔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탄자니아의 하드자(Hadza) 부족이나 남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Bushmen)이 비참한 빈곤 속에서 생존을 위해 쉬지않고 노동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오늘날의 하드자 부족('오늘날 돈 없이 풍요롭게 사는 문명'을 참조)이나 부시맨은 주위의 교역 및 농경 문명들로부터 밀려나 지구에서 가장 가혹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여태까지 부시맨은 연중 대부분 지표면에 물이 없는 뜨거운 사막에서 허리띠에 걸친 활과 화살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선물경제를 실천했다.

그 후 인류학자들이 하드자 부족과 부시맨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기존의 선입견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류학자들은 놀랍게도 이런 문명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자유롭게 보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세계의 다른 수렵채집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밝혀졌다.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 사람들은 많은 자유시간과 수면시간을 누리고 농사를 짓는 이웃들보다 덜 힘든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부시맨 한 집단이 식량을 구하는데 쓰는 시간은 매주 평균 12-19시간이고, 탄자니아의 유목민 하드자의 경우 14시간 미만이다. 한 부시맨에게 왜 다른 부족처럼 농사를 짓지 않냐고 묻자, 그는 "세상에 널린게 몬곤고(mongongo) 열매인데 왜 그래야 합니까?"라고 대답했다.

더 나아가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돈과 소유물 축적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일과 놀이의 구분이 사라지기 때문에, 일주일에 20시간을 일한다는 위의 주장마저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수렵채집인들이 얼마나 적게 일하고 얼마나 많은 풍요를 누리는지를 발견한 인류학자 마샬 사흘린스(Marshal Sahlins)는 1966년 처음으로 "최초의 풍요 사회(the original affluent society)"라는 개념을 널리 알렸다.

3. 마몬(Mammon, 부와 물욕의 신)이 우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몬을 섬긴다!

현대 문명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돈과 소유물이 우리를 일에서 해방시키고 여가시간을 준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돈과 소유물을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에겐 앉아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시간조차 없다! 덕분에 패스트푸드 업계가 번창하고 있다. 우리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돈과 소유물이 오히려 우리의 주인이 되었다. 만약 돈과 물건들이 우리를 섬긴다면 그것들을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그것들을 섬긴다. 우리는 마몬의 노예이다. 마몬은 마땅히 그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섬기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모든 시간을 소유물을 얻는데 쏟아 붓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섬길 시간, 당신의 이웃을 위한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속한 사회가 돈과 물질에 종속되지 않을 때, 가난한 자들은 줄어들 것이고 당신이 섬겨야 할 사람도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우리 문명의 터무니없이 거대한 빈곤에 더 이상 압도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복지사로 몇 년을 일한 후에도 정신과 체력이 고갈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공상적 박애주의자"였고, 사회복지사였기 때문에 현실을 알고 있다. 바빌론은 당신을 사회의 기생충이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바빌론은 당신이 노예처럼 일하지 않으면 생산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빌론은 당신이 비참한 삶을 살고 있어야만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나는, 노예는 진정으로 생산적일 수 없고,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노예는 자신을 종속시킬 더 많은 물건들을 만들고, 지구의 자원을 고갈시키며, 자원이 더 이상 모두에게 돌아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파괴적인 사람은 세상을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다. 몸의 일부에 해로운 세포가 있다면 그 세포는 몸 전체에도 해로운 것이다.

바빌론은 상업화된 문명이 "잔인한" 자연보다 낫다는 선전을 지속적으로 전파한다. 당신이 텔레비전에서 전형적인 자연 다큐멘터리를 본다면, 불쌍한 짐승들이 생존을 위해 지속적이고 끔찍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선전을 듣게 된다. 불쌍한 짐승들! 자연 다큐멘터리 내레이터의 말을 들어 보라. 그들은 대부분 손목을 그을 준비가 된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예를 들어 "펭귄: 위대한 모험(March of the Penguins)"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라. 이 영화는 아름다운 걸작이면서도 너무나 왜곡되어 있다. 당신이 실제로 자연을 경험하고 두 눈으로 마주할 때에는 어째서 그렇게 과장된 투쟁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걸까? 왜 자연은 정신적으로 너무도 편안한 반면, 고속도로나 산업 단지는 그렇지 않은 걸까? 곤충들과, 토끼들과, 도마뱀들과, 새들의 무리를 보라. 왜 그리도 장난치고 놀 것이 많은지?

자연 속에서 칭얼대는 생물이 대체 어디에 있는가?


4. 자연 선택

하지만 난 그렇게 순진하지만은 않다. 그렇다. 자연에는 많은 투쟁과 갈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투쟁과 갈등을 제거하는 것은 전자(電子)의 음전하(陰電荷)를 제거하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자연에는 도전하기에 딱 적합한 투쟁과 균형에 맞는 죽음이 존재한다. 이것은 모든 생명에게 필요한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괴물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투쟁 및 갈등'은 '휴식 및 놀이'와 어우러져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생명이 수백만년에 걸쳐 아름답고 조화롭게 생존해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음식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투쟁과 갈등이 필요하다. 사실 음식은 투쟁과 갈등이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황금빛으로 치장된 상업 문명의 철장 속에서 당신이 마주하는 끔찍한 지루함이 자연 속에도 존재하는가? 지루함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쉴새없이 애처로운 소리로 짖는 개를 자연에서도 볼 수 있는가? 동물원의 호랑이처럼 이리저리 불안하게 서성이고 자기 털을 물어 뜯어 살갗이 벗겨지는 호랑이를 자연에서도 볼 수 있는가? 나라면 동물원에 산채로 박제되거나 누군가의 뒷마당에 목줄이 매인 채로 사느니 죽어 멸종되는 것을 택하겠다.

자연은 지속적인 고통을 꺼려하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이탈시킨다. 상업 문명은 지속적인 고통을 통해 번성한다. 자연 속에서 영양실조나 비만에 걸린 동물을 본 적이 있는가? 만약 간혹가다 그런 동물을 볼 수 있다고 해도, 그 동물은 즉시 배제된다. 하지만 상업 문명은 만성 질병과 잘못된 유전자를 받아들이고 조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손 대대로 전파시킨다. 그래놓고 우리는 자연을 잔혹하다고 말한다.

5. 왜곡된 다윈주의(Darwinism Abused)

다른 모든 진실과 마찬가지로, 앞에서 내가 말한 것도 완전히 왜곡될 수 있다. 마치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당혹스러운 일이다. "나의 투쟁(Mein Kampf)"에 나온 히틀러의 철학은 어처구니없게도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sim, 사회진화론)"라고 불린다. 하지만 다윈주의의 핵심은 무작위적 자연의 법칙이 누가 번성하고 누가 그렇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다. 반대로 나치즘의 핵심은 "엘리트" 그룹이 자연을 대신해 누가 살고 누가 죽는지를 결정하는 비자연선택(Un-natural selection)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운명의 법칙(곧 자연의 법칙이자 신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비자연선택은 우리가 통제권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이며, 우리를 단련시키고 자연스럽게 선별해 낼 자연의 법칙을 믿지 않는 상태이다. 나치즘은 자연선택의 통제권을 빼앗아, 그것이 더 이상 자연선택이 아니게 했다. 나치즘은 다윈주의의 대척점이다. 세계 국가들의 생명선인 금융 시스템의 핵심 원리는, 자연선택을 피해 자연적 과정을 통제하는 것에 있다. 통제권을 포기하고 자연의 법칙에 맡기는 것을 믿음(faith)이라고 부른다.

만약 당신이 다윈의 자연선택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초등학교에 다녔으면 정자와 난자의 결합 과정에 대해 배웠을 것이다. 수백만 개의 정자 중 가장 적합한 정자만 난자에 도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만약 당신이 생물학을 배운 적이 없다 하더라도, 까다로운 공주의 선택을 받기 위해 여러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구혼자들에 대한 세계 각국의 전래동화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과연, 무한한 우주를 관통하며 모든 종교와 전설의 정수가 되는 자연 선택의 법칙보다 더 똑똑하고 더 도덕적일까? 우리는 우리가 무한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가 인위적으로 무한한 우주의 법칙을 피해가면, 정자들의 적자생존 경쟁을 피해가면, 삶이 더 향상될 것이라고 믿는 걸까? 우리는 정녕, 누가 혹은 무엇이 가장 생존할 가치가 있는지를 우리가 안다고 믿는 걸까?

다윈의 발견이 악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오용하기 때문이다. 종교(기독교든, 이슬람교든, 힌두교든, 무엇이든)가 악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오용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악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오용하기 때문이다. 약물이 악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오용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것이라도 악하다고 불린다면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오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돈이 악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오용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FAQ # 2. Do You Think Money Is Evil?" 참고)

수렵채집인들은 우리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도 결코 완벽하지는 않다. 비록 수렵채집인들이 존재하는 인간 사회 중 가장 균형잡힌 삶을 살고 있다 해도, 그들 역시 역사 속의 탐욕적인 사업과 거래와 소유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마도 우리는 태고의 수렵채집 방식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그들로부터, 그들의 생명선인 선물 경제(gift economy)의 원리를 배워 우리 문명에 적용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자연의 하사품인 선물경제로부터 분리시켰는가?

Coyote Stealing Fire by G. Yazzie (Navajo Creation story)

6. 하늘에서 훔친 불: 보편적 신화

수렵채집 부족으로부터 거대문명에 이르기까지 세계 모든 문화 집단은, 어떻게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사건은 우리를 신들(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엘로힘[Elohim]이라고 불림)로부터 분리했고, 우리를 신들과 같이 만들었으며, 천상으로부터 지상을 분리했다. 

근본적으로 이 세계보편신화는, 태초에 우리에게 불이 없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들과 같았다. 그리고 천상과 지상은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날 음식을 먹었다. 그러다 어떤 사람이, 신들은 불을 소유하고 통제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어떤 교활한 인물이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로 가져온다. 이것은 신들을 분노하게 했고, 우리를 천상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켰다. 불은 우리의 축복이자 저주가 되었다.

그럼 이 신화를 현대의 언어로 번역해 보자.

불은 에너지다. 원래 에너지는 우리가 하늘에서만, 주로 태양이라는 형태로 볼 수 있던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불이 번개의 형태로 지상에 내려오는 것을 보기도 했다. "우리가 이걸 길들이면 어떨까?" 어떤 사람이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생물도 갖지 못했던 힘을 부여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른 모든 생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나누는 방법을 알았다면, 불을 길들이는 것은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독점했다. 우리는 이것을 사고 팔며, 마치 우리가 소유한 것처럼 비축했다.

실질적으로 인간이 이용하는 모든 에너지는 태양에서 왔다. 이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에너지도, 내 몸의 세포를 작동시키는 에너지도 태양에서 왔다. 사람들은 내가 돈으로 운영되는 발전소에서 생산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돈 없이 사는게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설명하려는 것은, 우리가 그 근원을 더 멀리까지 추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너지는 원래 발전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에너지는 태양에서 왔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에너지는 빅뱅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빅뱅 이전으로부터 왔다.

태양에서 온 모든 에너지는 공짜로 제공되었다. 에너지 자체가 공짜인 것은 아니다(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지만 공짜로 제공되었다. 자연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태양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준다. 태양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싶다고 해도 그럴 수 없다! 원래 에너지는 소유할 수도 없고, 사고 팔 수도 없었다. 그러다 어떤 교활한 사람이 그것을 훔칠 생각을 했고, 그는 결국 에너지를 소유하고 팔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곧 다른 생명들을 지배하는 힘이었고, 신들과 같이 되는 것이었다.

태양은 아무런 편견도 없고 심판을 내리지도 않는다. 태양은 선인과 악인을 모두 비춘다. 태양은 당신이 적합한 대상인지 확인하기 위해 무료 서비스 지원 신청서를 작성하라고 하지 않는다. 수백만 명을 학살한 사람에게도 태양은 빛을 비춘다. 수백만 명을 먹이고 치료한 사람이라도 태양빛에 말라 죽을 수 있다. 태양은 완전히 무심하다.

반면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훔친 이 교활한 인간은 우리를 갈취한다. 이 사기꾼은 우리가 그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믿게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는다. 죄책감은 빚이다. 그는 우리에게 빚을 심는다. 그는 우리가 모든 것을 그에게 빚졌다고 믿게 한다. 그에게 지불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게 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에게 적합한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면, 그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배은망덕하고, 인색하고, 맹목적이다. 왜냐하면 태양이 그에게 아무 대가없이 무료로 베푼 것을 우리에게는 베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빚을(죄를) 사할 수 없다. 그리고 그에게 휘둘려 사는 우리도 그와 같다. 완전히 배은망덕하고, 인색하고, 맹목적이다. 우리는 태양처럼 (아무 대가없이, 무료로, 판단하지 않고) 남에게 베풀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빚이(죄가) 면제되기를 바라면서, 남이 우리에게 진 빚은(죄는) 용서하지 못한다.

Prometheus Steals Fire from Apollo's Sun Chariot by Giuseppe Collignon (Italian, 1778 - 1863)

7.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에게서 불을 훔친 이 사기꾼은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Προμηθεΰς)라고 불린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어로 "미리 생각하는 자(Forethought)"를 뜻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에피메테우스(Epimetheus, Επιμηθευς)라는 쌍둥이 동생이 있는데, 이름은 그리스어로 "나중에 생각하는 자(Afterthought)"라는 뜻이다. 미리 생각하는 자가 하늘에서 불을 훔쳤다. 미리 생각하는 것과 나중에 생각하는 것은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는 마음이다. 미리 생각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다. 제대로 공급받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 나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걱정이다. 미리 생각하는 것은 믿음(faith)의 결핍이다. 미리 생각하는 자는 태양이 제 역할을 모르고, 어떻게 에너지를 분배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태양은 최악의 폭군과 고귀한 성자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는가? 미리 생각하는 자는 자신이 태양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태양의 에너지를 훔친다. 나중에 생각하는 것(에피메테우스)은 미리 생각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나중에 생각하는 것은 곧 후회, 죄책감, 빚이다. 에피메테우스와 프로메테우스는 은총(Grace), 믿음(Faith), 용서(Forgiveness)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예수 [마태복음 6:25, 34])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예수 [마가복음 13:11])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예수 [마태복음 5:33-34, 37])

맹세하는 것은 빚이다. 빚은 지불 서약이다.

약속하지 말라. 미리 숙고하지 말라.

미리 생각하는 자, 프로메테우스가 되지 말라. 

치유의 수레바퀴

8. 우리는 치유의 수레바퀴(medicine wheel)에서 자리를 잃었다

우리 스승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을 제외한 
우주의 수레바퀴(Universe Wheel) 속 모든 존재가
다른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서로에게 베푸는 법을 안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 중에
대조화(great harmony)의 지식에 맞춰 살지 않는 것은 오직 우리 뿐이다.
강, 바위, 하늘, 식물, 동물을 포함한
우주의 수레바퀴 속 모든 존재에 영혼과 삶이 있다.
하지만 수레바퀴의 모든 존재 중 결정하는 자는 오직 인간 뿐이다.
우리의 결정하는 영혼은 오직
모든 형제자매들과의 조화
또한 우주의 모든 영혼과의 조화를 통해서만 완전해질 수 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탐구하고 인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치유의 수레바퀴에서 우리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이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베푸는 법을 배워야 한다.
(Hyemeyohsts Storm, Seven Arrows)

우리의 타락에 대한 유대-기독교적 설명, 즉 선악과 나무(보상-처벌 나무)로부터 열매를 따는 것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알고 싶다면 다음의 글을 확인하라: "일곱 머리의 용(The Seven Headed Drag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