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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사랑과 소유 - 섹스와 돈 (Love & Possession - Sex & M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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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과 소유 - 섹스와 돈 (Love & Possession - Sex & Money)

글쓴이: 다니엘 수엘로

The Queen of Sheba: Ethiopia's Queen Makeda

어젯밤 나는 마을에 내려와 나무집에서 명상했다. 나는 강렬한 의혹을 품었고, 명쾌한 해답을 얻었다. 사물의 이치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어젯밤 나는 낙담하고 지쳐 있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제자리 걸음을 하며 한 발자국의 진전도 못한 것처럼 느꼈다. 나는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다. 난 그저 괴짜일 뿐인가? 나는 내가 지금까지 일해왔다고 생각했다. 내 수년간의 노고(work)를 통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그리고 나서 깨달았다. 이건 내가 가진 "상과 벌(credit-and-debt)"에 대한 집착이구나. 이 마음은 자기가 하지도 않은 것에 대한 상(credit)을 바라며 이렇게 묻는다. "내가 한 일(work)에 대한 보상(credit)은 어딨어?"

이 진리의 순간 나는 시간의 저편, 찬란한 광휘와 전우주가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과 평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간단하고, 자유롭고, 쉬운 것을 지금까지 간과해 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랑! 바로 이거다! 어젯밤 이 개념이 정말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그 광휘, 그 무상의 선물은 바로 사랑이었다! 

솔로몬 왕을 만나는 시바 여왕을 묘사한 에티오피아 그림

1. 사랑과 소유 (Love & Possession)

우리는 소유가 곧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을 돈으로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남편은 아내를 소유한다. 아내는 남편을 소유한다. 부모는 자식을 소유한다. 또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소유물을 잔뜩 준다. 연인들은 서로에게 소유물을 잔뜩 준다. 그러다가 아이가 말을 안 듣거나 연인 관계가 틀어지면,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너한테 해준게 얼만데, 그걸 이렇게 갚아?" 바로 이 말에 부모의 실패, 연인의 실패에 대한 답이 담겨있다!

우리의 가정과 인간관계는 진정한 가정과 인간관계가 아니라 직업(professions)이다. 가정과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직장일까지 모든 것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즉 매춘과 같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 그 사람이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준다거나 내버려서 기분이 상했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선물을 준 것이 아니다! 그건 선물이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는 흥정수단이었던 것이다. 그건 교묘한 조작이자 권력 과시이지 선물이 아니다! 만약 선물을 받고 거기에 담긴 "감정적 가치(sentimental value)" 때문에 그것을 버릴 수 없다면, 당신은 그 교묘한 조작에 빠져 예속된 것이다. 감정적 가치는 마치 사랑인 것처럼 포장되기 때문에 가장 간악하다. 감정적 가치 때문에 당신은 진실과 양심을 따를 수 없게 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이 아니라 부모의 감정적 가치에 매여있다.

때로는 고타마 싯다르타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위대한 왕국과 그에 딸린 모든 부를 상속할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예속을 보았고 그것이 자기 자신의 예속인 것을 인지했다. 그래서 그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와 왕실의 혈통을 포기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준 것이 얼마나 많은데, 너는 이런 식으로 빚을 갚느냐?" 하지만 그는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그들이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깨달은 자, 곧 부처가 됨으로써 그것을 증명했다. 그와 동일하게 깨달은 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는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심지어 그의 육체과 사상까지도 포기한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한복음 12:49)

2. 소유는 섹스가 죄, 곧 빚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Possession makes us think that sex is sin, in other words, that sex is debt)

나는 한때 사랑에 빠졌고, 내 마음은 산산조각 났다. 나는 사랑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 관계에서 생긴 사랑은 여전히 남아 있고, 영원하다는 것이다. 나는 진정한 그를 영원히 간직할 것이고, 진정한 나는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의무감으로 당신과 성관계를 하기 바라는가, 아니면 당신을 사랑해서 성관계를 하기 바라는가? 당신의 관계는 피곤한가 아니면 평온한가? 만약 피곤하다면, 그 피로는 사랑이 아닌 일, 의무, 소유에서 온 것이 아닌가? 대가없이 그냥 주는 대신, 무언가를 얻고, 소유하고, 움켜쥐려 하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섹스가 빚이 되는 순간이다. 빚(debt)은 죄(sin)의 동의어이다("우리 를 사하여 주시옵고[forgive us our debts]"를 기억하라). 상과 벌(Credit and Debt) 개념에 빠진 많은 종교인들이 섹스에 관해 전전긍긍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종교가 있든 없든, 색정광이든 금욕주의자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섹스에 관해 전전긍긍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 섹스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빚이고, 우리는 상과 벌에 얽매인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섹스를 경계해야 한다(그러니 그들을 심판하지 말라). 사랑을 통해 하는 섹스를 배울 때까지,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좋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디도서 1:15)

이스라엘의 도르카스 가젤(Dorcas gazelle)

3. 공짜가 아닌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Love that is not free is not Love)

사랑이 강제될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 사랑은 때가 되면 알아서 온다. 안 그렇던가? 하지만 우리의 성급함은 상식을 무시한다. 당신은 사랑을 잡을 수 없다. 사랑에 빠져야 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면, 당신은 쉴 새 없이 애인을 생각한다. 아닌가?

성경의 가장 심오한 구절 중 하나이자, 깨우침의 비결은 솔로몬의 노래(아가서)에 세 번 노래된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아가서 2:7, 3:5, 8:4)

이것이 바로 명상의 핵심 비결이자 신과의 합일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4. 신성한 깨달음 (Divine Enlightenment)

당신이 일정 시간 동안 명상이나 기도를 해 본 적이 있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마음을 신성함(the Divine)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마음은 현재(Present)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오직 사랑(Love)만이 마음을 신성하게 한다. 마치 사랑에 빠졌을 때, 24시간 내내 애인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면 온 세상이 순수해진다. 안 그런가?

명상하는 동안 마음은 동정심에 기반해야 한다고 티베트 불교 승려들이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오직 신만이 신을 사랑할 수 있다. 당신을 통해서! 하지만 당신이 스스로의 힘을 통해 신성함에 이르려 한다면, 한동안은 지고한 천상에 이를 수도 있고 많은 제자를 거느린 스승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심연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을 통해 흐르는 사랑이 아닌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신성함"은 그저 환상이고 우상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사랑은 시간의 진행으로부터, 또한 노동과 보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사랑은 순수한 선물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결정을 내리라. 성경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이 수 차례 등장하지 않던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5. 분투와 의혹 또한 나의 선생님 (Striving & Doubt, Also My Teachers)

어젯밤 나는 분투와 의혹의 시간 또한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믿음과 의혹(Belief & Doubt), 신뢰과 의심(Credulity & Doubt), 신용과 빚(Credit & Debt) 모두 축복이다. 이것들은 내가 독선적이고 비판적이 되는 것을 막아준다. 왜냐하면 온 세계가 의심과 빚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투와 의혹을 통해, 광휘(splendor)는 그것을 보는 자에게 내려진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을 얻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열려 있는 것, 가만히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 어떤 노력도 없이, 판단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는 것, 지켜보는 것. '기다리다(wait)'와 '지켜보다(watch)'는 같은 인도-유럽어 뿌리를 가지고 있다. 유대교 경전은 우리에게 쉴 새 없이 여호화(Jah)를 기다리라고 당부한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편 27편 14절)

기독교 성서에서 예수가 우리에게 쉴 새 없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라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부처 또한 우리에게 쉴 새 없이 지켜보며 기다리라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 마저 일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딜레마다. 나는 아기 때부터 들어온 복음주의 기독교의 가르침을 의식으로부터 결코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을 나타내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장 8-9절)

사실 이 구절은 종교 개혁에 박차를 가한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의 핵심이기도 하다. 당시 교회는 말 그대로 천국으로 가는 입장표를 팔 만큼 극심한 타락 상태였다! 루터는 단지,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 아빌라의 테레사(Theresa of Avila), 성 십자가의 요한(St. John of the Cross)의 고귀한 가르침과 같은, 가톨릭 교회가 잊고 있던 진정한 가톨릭 교리의 핵심을 발굴해 냈을 뿐이다.

그리고 힌두교도라면 이 은총(Grace)이야말로 힌두교의 핵심임을 알 것이다. 예를 들어 신약 성서보다 한참 전에 쓰여진 우파니샤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브라만(Brahman, 힌두교의 최고 원리이자 최고신)은 눈으로도, 말로도, 다른 어떤 감각으로도,
어떤 고행이나 선행으로도 파악할 수 없다.
고요한 지성을 통해 완전히 정화된 순간, 명상 속에서,
분리되지 않은 를 볼 수 있다.

(문다카 우파니샤드 3.1.8)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에 따르면, 우리 자신의 업적은 우리를 천상으로 데려갈 수 있지만, 그 후에는 추락이 따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업적을 포기할 수 있는가? 자신이 해낸 일에 대한 공로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에 대한 열매를 포기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우리를 통하여 일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가바드 기타 3:27, 4:20, 5:14, 9:21)

언제나 온가지 행작을 하면서도 그는 나를 의지하고 내 은혜에 의하여 영원불멸의 경지에 들어 갈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 18:56)

세상에 살며 여전히 카르마[업보, 빚]에 얽혀 있는 우리는
오직 당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세상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스리마드 바가바탐 11.2)

코란(Quran)은 천상의 조화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성서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라
그분의 은혜는 그분 안에 있어 그분이 원하는 자에게 부여 하시나니
하나님은 위대한 은혜의 주님이시라

(코란 57:29)

불교 경전은 뭐라고 말할까?

소승불교(Theravada):

단지 계율이나 종교적 의무의 준수만으로 또는 학식이 있는 것으로
또는 삼매(=定)에 든 것이나 멀리 떨어져 자는 것으로
또는 명상에 잠겨 있더라도 홀로 누워 있더라도 얻기 어렵다.
그러니 수행자여 방심하지 말라 마음속 번뇌가 다 끊어지기 전에는.
(법구경 19:272)

대승불교(Mahayana):

진심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오직 부처(깨달은 자)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이 부처의 도움 없이 불성(佛性)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The Teachings of Buddha, By Bukkyō Dendō Kyōkai, 70)

부처님의 신력(神力)에 의해 그들은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쳐 보듯이
저 청정한 불국토를 보게 될 것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Amitayur Dhyana Sutra, § 8)

시크교의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Guru Granth Sahib)도 빼 놓을 수 없다:

다양한 고행이나, 배움, 명상, 엄격한 규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없다.
나낙이 말하길, 우리는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신성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아디 그란트, 가우리 바반 아카리 M.5, p.251)

6. 할렐루야(הללויה)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Hallelujah הללויה Sums it all up)

우주의 모든 입자가 할렐루야를 노래한다!

할렐루야(Hallelujah)는 "모든 영광(credit)을 여호와에게" 혹은 "모든 찬양을 여호와에게"라는 뜻이다.

이것을 당신의 거룩한 기도로 삼으라.

모든 영광과 모든 빚은 여호와 앞에 놓여야 한다. 그로부터 훔친 것들을 그에게 돌려 드려야 한다.

은총(Grace)은 도교(道敎)의 본질이기도 하지 않던가? 도덕경의 아무 곳이나 읽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도(道)는 자유로이 주고,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현자는 자유로이 주고,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자신을 내보이지 않으니 밝고,
스스로 옳다하지 않아 드러나며,
자랑하지 않아 공이 있고,
뽐내지 않아 오래간다.
(도덕경, 22장)

이것이 바로 모든 종교의 핵심이 아니던가?

깨달음은 상과 벌(Credit & Debt), 선과 악(Good & Evil), 자아(Ego)의 너머에 존재한다.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세계 정치와 금융에 이르기까지, 상과 벌에 대한 통제욕이 우리를 예속하고 파멸시킨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것은 환경, 가정, 우정, 경제, 정신을 파괴한다. 통계 자료를 들춰볼 필요도 없다. 바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명백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7.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매춘부다. 어떻게 매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So we are all Prostitutes. How do we become free from our own prostitution?)

매춘부들은 그들의 계약에 얽매인 노예들이다. 당신은 어떤가? 특히 가난한 국가들에서는, 매춘이 많은 여성들(그리고 소년들)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다. 그들에게는 매춘이 아이들을 먹이고, 길거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성서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창녀를 특별히 생각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누가복음 7장 37절) 또한 예수는,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어렵다는 가르침과 함께, 부유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연민을 갖고 있었다. (삭개오재물이 많은 사람)

나는 가끔 나 자신이 분투에, 속박에, 빚에 갇혀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나는 그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나의 분투 속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처한 어떤 상황도 깨달음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매춘도 우리의 영적인 길이 될 수 있다. 창녀도 일을 하던 어느 날 사랑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 창녀가 손님과 사랑에 빠지고, 손님이 창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이 주제에 관한 몇몇 이야기나 영화가 있어 왔다.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돈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손님은 더 이상 그녀에게 돈을 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더럽힐 수 없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하고 신성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춘은 끝난다.

"하지만 나는 내 일을 사랑해"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나보다 낫다. 누구든지, 자신이 그저 자신의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받든 받지 않든,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전도서의 저자도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 (전도서 2:24, 3:13, 5:18)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전도서 2:24)

일과 놀이를 구분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해탈 아닌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돈이 쓸모 없어지고 우리의 사랑이 진실해지는 순간이다. 이것이 바로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이사야 21:9, 요한계시록 18:2)"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