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저자: 이수영
[1]
-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기 전 용어를 이해하고 전체적인 흐름을 알기 위해
[2] 내용
- 실체란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임. 삼각형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삼각형을 그린 사람이나 삼각형을 그린 도구(외부 원인)를 아는 것과는 관계 없이, 삼각형의 구성 방식(세 변과 세 점)이나 내재적인 특성(내각의 합은 2직각)을 아는 것임.
- 컵, 사랑, 전쟁, 증오, 핵발전소, 허영심, 은행나무, 공포에 빠진 인간, 사랑으로 충만한 인간 모두 양태임. 동일한 인간도 증오의 상태와 사랑의 상태가 다르듯이 모든 양태는 매순간 자신의 mode를 바꾸면서 존재함. 양태는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을 통해 파악되는 것"임. 컵은 흙과 장인과 용도에 의존하고, 증오는 슬픔에서 비롯됨. 양태들은 실체의 다양한 mode들임.
- 실체는 자체적으로 존재하고 자체적으로 파악됨. 곧 실체의 본성 자체에 이미 존재(실존)가 속함. 이는 곧 자기원인(cause of itself)이라고 함. "자기원인이란 그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또는 존재하는 것으로서가 아니고서는 그 본성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임.
- 실체의 영원성(eternity)과 양태의 지속성(duration). 신체, 식물, 땅, 미생물 등 양태들의 변용에도 불구하고 영원하고 무한한 연장 속성을 느낌. "만약 이 물질 중 한 부분이라도 제거될 수 있다면 연장 전체가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양태로서의 먼지는 우리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지만 연장속성으로서의 먼지는 영원하다는 것임.
- "신이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제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라고 나는 이해한다." (1부, 정의 6) 자석의 본질이 쇳가루를 끌어당기는 능력(속성)이듯이 신의 본질은 무한한 속성들임.
- 우리는 인간을 낳을 수는 있지만 인간이라는 본질 자체를 낳을 수는 없음. "한 인간의 실존이 정지된다고 해서 다른 인간의 실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인간의 본질이 파괴되어 허위가 된다면 다른 인간의 본질도 역시 파괴될 것이다"
- 그리스도와 예레미야의 가르침은 국가가 소멸되는 상태이거나 국가적 정의가 무시되는 압제의 시기에만 적용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음. 반면 헤브라이 민족국가의 탄탄한 기초를 마련하고자 했던 모세는 이웃에 대한 복수를 비난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권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원칙을 요구함. 이렇게 성서의 구절을 해석할 때 그 구절이 기초하는 역사적 문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으면 성서의 의미는 왜곡되고 해석 간의 타툼과 증오가 발생.
- 성서는 복종을 위한 훈련이고 복종을 촉진하는 수단들이지 결코 지식을 전하는 수단들이 아님. 성서의 목표는 신의 가르침에 따라 살 것, 즉 이웃에 대한 사랑만이 신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임. 따라서 성서가 비난하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신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완고함임. 모세의 경우 처벌과 보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계율에 복종할 것을 권유함. 이성의 영역이 "진리와 지혜"라면 신학의 영역은 "경건과 순종"임. 성서는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복음. 이성적인 보편성보다는 경험과 풍문으로 확인할 수 있는 손쉬운 배움.
- 성서에 나타나는 신의 말씀은 변경과 번역 과정 속에서도 결코 훼손되지 않고 명확함. 그것은 바로 신을 사랑하라는 것,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 신은 존재한다는 것, 그는 전지전능하다는 것, 구원은 신의 은총에 달렸다는 것, 정의를 지지하라는 것, 불우한 이웃을 도우라는 것, 살인하지 말라는 것, 남의 소유물을 탐내지 말라는 것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의 삶 속에 구원이 있다는 것, 이것이 성서의 핵심임.
- 헤브라이어로 '존재하다'의 세 가지 시제, 즉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실체를 '여호와'라 하는데, 모세는 분명 신을 이런 존재라고 믿고 있었으면서도 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자비롭고 인자하고 그러면서도 질투하는 존재로 가르침.
- "존재 불가능한 것은 무능력이고 반대로 존재 가능한 것은 능력이다. 그래서 만약 지금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오직 유한한 것일 뿐이라면 유한한 것들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보다 더 유능할powerful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 이해되듯이 터무니없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거나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거나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것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 즉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 실존하는 것은 능력이고 실존하지 못하는 것은 무능력임. 바다 속에서 익사하는 것은 파도의 힘을 이기거나 그것을 이용할 수 없는 무능력에서 기인함.
- 그물망 짜는 일이 거미에겐 쉽지만 인간에겐 어려움. 악행은 인간에겐 쉽지만 천사들에겐 어려움. 쉽다/어렵다는 개념은 상대적인 개념이라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음.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의 본성 혹은 본질을 일정하고 결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다시 말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만물의 원인인 신의 능력을 일정하고 결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1부 정리 36 증명)
- 신의 절대적인 실존 능력은 곧 변용 능력이고, 신의 변용은 곧 만물의 생성이며, 만물의 생성은 또한 만물의 수많은 변용이 됨. 존재한다는 것은 고정된 채로 요지부동인게 아니라 여러 방법으로 움직이고 바뀌고 변화되고 반응하고 창조하는 것임.
- 스피노자는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행위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하고 자기 본성이 아니라 다른 것의 본성에 의해 강제된 것을 부자유라고 말함. 자유에서 중요한 것은 제약의 유무가 아니라 본성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임. 나무나 다른 자연적 제약이 있어도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은 거미의 본성을 따르는 행위이므로 자유이자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음. 거미가 파리를 '위해' 거미줄을 치지 않을 때 그 삶이 처참해짐.
- 본성의 필연성에서 기계적인 결정론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자유의 영역이 본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유의지라는 못된 도덕적 개념을 만들게 됨. 각자 자신의 본성에 맞춰 살기 때문에 다채로운 사건들이 등장하고 인간사의 굴곡도 생겨남. 어린아이는 먹고 싶은 욕망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물건을 잡을 때 자유로움을 느낌. 하지만 자유의지론자들은 이것이 본성(욕망)에 의해 강제된 기계적 행위지 자유가 아니라고 함. 그들의 자유는 본성을 따르지 않는 본성의 억압임. 그래서 자유의지론자들은 엄격한 금욕주의자가 많음.
- 통상적으로 자유는 무엇을 뜻대로, 마음대로 하는 상태, 제약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함. 하지만 그것이 정말 제약이 없는 상태가 아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는 '욕망'에 의해 행해지는 것임. 인간은 자기원인도 아니고 만물의 원인도 아니어서 자기 외부에 수많은 원인을 두고 있음. 외부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존재하지 않음.
- 스피노자는 자유를 자유로운 결정free decision이 아닌 자유로운 필연성에 위치시킴. "우리가 신 즉 자연이라고 부르는 저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필연성에 의해 활동한다. 그러므로 신 즉 자연이 활동하는 이유나 원인은 신이 존재하는 이유와 동일한 것이다. 신이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목적을 위해서 활동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가 존재의 원칙이나 목적을 갖지 않듯이 활동의 원칙이나 목적도 없다. 소위 목적인final cause이라는 것은 사물의 원칙이나 제1원인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인간의 충동에 불과한 것이다.(4부 서론)"
- 신적인 본성의 필연성에서 무한히 많은 것이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생겨나고, 그 모든 것은 신성한 법칙에 의해서만 활동함. "신에 의해 작용하도록 결정된 사물은 자신으로 하여금 결정되지 않게끔undetermined 할 수가 없음." (1부, 정리 27) 바람직한 욕망에 따라 사는 것도 우리 본성의 필연이고 헛된 욕망에 따라 사는 것도 우리 본성의 필연임. 모든 것은 필연임. "자연 안에는 우연적인contingent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신적인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결정되어 있음" (1부 정리 29)
- 마음만 굳게 먹으면 안 되는 일은 없다고, 중요한 일은 '정신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지를 외부 원인의 작용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설정하는 것임. 이때 의지는 데카르트가 믿었듯이 신처럼 스스로 활동하는 무한의 능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됨. 이는 유한한 양태인 인간 안에 신적인 의지가 존재한다는 성립할 수 없는 개념.
- 하나의 생각은 다른 생각으로 전염되고, 다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전염되는 연쇄반응을 겪음. 이것이 정신과 욕망의 법칙임. 자유로운 욕망이나 자유로운 정신은 없음. 신체와 마찬가지로 욕망, 정신, 의지도 인과의 법칙 속에서만 존재함. "의지는 자유로운 원인이 아니라 단지 강제된necessary 원인이라 일컬어질 수 있음." (1부 정리 32)
- 정신적 자동 기계spiritual automaton: 정신은 사물과 독립해서 관념들만의 인과관계 속에 존재함. 반영론적 인식론에서 벗어난 평행론적 인식론.
- 인간은 자신의 의지력이 행하는 자유로운 결단을 통해선는 결코 신체를 조율하지 못함. "그래서 젖먹이는 자유로이 젖을 원한다고 믿는다. 성난 아이는 복수를 원한다고 믿는다. 겁쟁이는 도망치기를 원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술 취한 사람이, 술이 깼을 때는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하는 말을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미치광이, 수다쟁이, 어린아이, 그리고 이런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말하고 싶은 충동impulse을 억제할 수 없으면서도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을 통해 말한다고 믿는다." (3부 정리2 주석)
- 모든 물체body(신체)는 단순하거나 복잡한 물체임. 단순한 물체의 경우에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됨. 복잡한 물체는 특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에 의해 다른 신체와 구별됨.
- 우리 정선이 형성하는 관념들은 기본적으로 부적합함inadequate. "외부 신체를 현존하는present 것으로 나타내는, 인간 신체 변용을 우리는 사물의 이미지images of things라 부를 것인데, 비록 그 관념이 [외부] 사물의 형상을 재현하지는reproduce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정신이 신체를 이런 방식으로 파악할 때 우리는 그것을 상상한다imagine고 말할 것이다." (2부 정리 17 주석) 우리는 외부 물체의 본성을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대신 우리 신체의 본성을 포함하는 방식(시신경에 각인되고 변형된 방식)으로 지각하기 때문에 그런 관념은 상상적 이미지라고 불리고,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말함. 바퀴벌레를 보고 징그럽고 추하다고 느낀다고 해도 그것이 바퀴벌레의 본성은 아님. 신 안에는 그 어떤 부정도, 모순도, 제한도, 추함도 존재하지 않음. 바퀴벌레의 추함은 바퀴벌레의 형태와 우리의 신체 반응이 결합해 만든 상상적 이미지임. 이런 점에서 외부 물체에 대한 관념은 "외부 물체의 본성보다도 우리 신체의 상태를 더 많이 가리킨다indicate." (2부 정리 16 보충 2)
- 신은 1) 나에 대한 관념, 2) 태양에 대한 관념, 3) 나와 태양의 거리에 대한 관념, 4) 내게 지각된 태양에 대한 관념(동전만 한 태양)도 갖고 있음. 반면 나는 4)의 관념만 갖고 있음. 신이 갖는 관념을 부분적으로만 갖고 있는 것임. 이것 자체는 오류가 아니지만 이것이 태양의 본성을 표현하는 관념이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면 나는 오류에 빠지게 됨(부적합 관념). 하지만 2)와 3)의 관념도 갖는다면 오류에 빠지지 않음.
- 1종 인식: 부분적이고 부적합한 인식. 무작위적 경험과 기호에 의한 인식. 동전만 한 태양의 관념이나 베드로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신체의 흔적에만 열중해 베드로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바울. "결과들을 받아들이되 그 원인들을 알지" 못하는 상태. 부분적 인식. 원인에 대한 파악에 무능력. 원인과 본성을 파악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인식이 참된 것이라고 하는 환상과 망상.
- 2종 인식: 이성적인 인식이자 공통 개념.
- 3종 인식: 신적인 직관.
- 기억과 연상: 특정한 상황을 경험한 인간에게만 특징적인 관념들의 연결,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는 관념의 연결. 신체 변용의 습관이 표현된 관념. 예를 들어 로마인은 pomum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과라는 과일을 떠올림. 필연적인 연결 대신 자의적인 연결만 있는 것이 언어의 특성. 사과라는 사물과 pomum이라는 발음이 동시적으로 관찰되는 경험, 신체적 습관에 의해 pomum과 사과가 연결됨.
- "감정이란 신체의 활동 능력power of acting이 증가되거나 감소되고, 촉진되거나 억제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 변용에 대한 관념" (3부 정의 3)
- "정신의 수동passion이라 불리는 감정은 혼란스러운 관념인데, 이것에 의해 정신은 자신의 신체나 신체의 일부가 전보다 더 커지거나 작아진 존재력force of existing을 긍정하며, 정신은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많이 사유하도록 결정된다." (3부)
- "감정은 정신에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관념인데, 그것에 의해 정신은 자기 신체에 대하여 이전보다 더 크거나 더 작은 존재력을 긍정한다." (4부 정리7 증명)
- 감정에는 기쁨의 계열과 슬픔의 계열이 있음. 외부 신체의 영향으로 인해 우리 신체의 활동 능력이 증가될 때 신체적 능력의 증가분에 해당하는 정신의 관념이 기쁨이라는 감정.
- 과거와 비교된 현재의 증가분이 아니라 현재의 증가 '추세'를 나타내는 게 기쁨이고, 과거와 비교된 현재 감소분이 아니라 현재의 감소 '추세'를 나타내는 게 슬픔임. 맹인인 상태에서 다시 병에 걸리면 슬픔을 경험하지만, 점자 읽는 법을 익히면 기쁨을 경험.
- 만약 슬픔이 완전성에서 불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에 대한 긍정이라면 우리는 모두 슬픔의 종족이 될 수밖에 없음. 왜냐하면 누군가는 팔이 없고, 누군가는 집이 없고, 누군가는 애인이 없고, 누군가는 학벌이 없고, 누군가는 권력이 없기 때문임. 모든 것을 갖춘 인간도 영원한 생명이나 전능한 능력은 갖지 못함. 하지만 이 모든 사람들이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슬픔을 느끼기도 함.
- 인간의 감정은 수동(passive)이라는 점에서 정념(passion)이라고 불림. 기쁨이든 슬픔이든 수동적인 성격을 가짐.
- 노트북을 제조하는 공정 중 자판을 결합하는 일만을 한다면 노트북의 발생을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음. 이렇게 어떤 원인의 결과가 그 원인만 가지고서는 이해될 수 없을 때 "부적합한 원인 또는 부분적인 원인"이라고 함. 반면 어떤 원인의 결과가 그 원인에 의해 명석하고 판명하게 지각될 수 있을 때 그것을 "적합한 원인"이라고 함. 복잡하게 얽힌 현대 분업사회에서는 우리가 부분적인 원인에 그치고, 수동적인 존재가 될 공산이 큼.
- 발생적 인식론: 결과를, 그것을 낳는 원인에 연결시키기, 이 원인에 대한 인식을 통해 결과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기.
- "정신은 부적합한 관념을 더 많이 가질수록 수동적이게 되고 반대로 적합한 관념을 더 많이 가질수록 능동적이게 된다." (3부 정리 1 보충)
- "정신의 능동은 적합한 관념에서만 발생하지만 수동은 부적합한 관념에만 의존한다." (3부 정리 3)
- 우리는 부적합한 관념 없이 살 수 없는 유한한 양태지만 적합한 관념이 많이질수록 자연의 일부라는 유한한 조건 속에서도 능동의 존재가 될 수 있음.
- 욕망: 모든 사물은 정신적인 양태든 연장적 양태든 상관없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함. 이 존재의 지속 노력striving, conatus은 모든 사물의 본성이며, 실존하는 모든 사물의 현실적actual 본질임.
- 기쁨과 슬픔은 외부 사물이 우리에게 끼친 (수동적) 효과이지만 코나투스는 그런 효과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려는 현실적 본질의 발현.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쁨을 느낄 때, 기쁨의 원인은 외부 사물인 음식이지만, 그 기쁨 때문에 음식을 더 먹고자 하는 욕망은 우리 본성(코나투스)에서 발원함.
- 기쁨, 슬픔, 욕망의 세 가지 감정의 조합으로 다양한 감정들이 설명됨. "사랑이란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 기쁨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욕망이 사랑임. "증오란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증오 속에 빠져드는데, 증오는 곧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코나투스임. "공포는 의심스러운 사물의 이미지로부터 생기는, 안정적이지 못한 슬픔." "희망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해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 사물의 이미지로부터 생기는, 안정적이지 못한 기쁨." "공포 없는 희망도 없고 희망 없는 공포도 없다" (3부, 감정의 정의 13 해명)
- 우리에게 해악을 가한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복수심),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보답하려는 마음(감사), 칭찬받을 때 느끼는 기쁨(명예심), 비난받을 때의 슬픔(치욕), 자신에 대한 과대한 사랑(자만), 자신에 대한 과도한 비하(의기소침),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고 불행을 슬퍼하는 연민compassion,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는 질투envy, 부에 대한 과도한 욕망인 탐욕greed, 섹스에 대한 과도한 욕망인 정욕lust.
- 금욕적인 약속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지 않는 까닭은 우리의 본질이 코나투스이기 때문임.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로만 주변을 채우면 그 누구도 증오하지 않고 사랑의 감정속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지만 삶은 그렇지 않음. 금욕으로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해결할 수 없음. "종교의 가르침은 죽음의 순간이나 절간에서나 도움이 됨. 그것이 가장 필요한 법정이나 궁궐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함."
- 능동이라는 필연성을 창출하는 구체적인 조건과 방법: 공동체, 능동, 공통 개념(적합한 관념)
- 정신이 동시에 두 감정에 의해 자극받으면 하나만 경험해도 그것과 관련된 다른 감정이 연쇄적으로 따라 나옴. 외부 물체의 본성보다는 우리 신체에 각인된 흔적에 반응하는 것임. 이 감정의 연쇄로 인해 사랑이나 증오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닌 대상에 대해 쉽게 사랑이나 증오의 감정에 빠짐.
- 우리는 남들이 사랑하는 것을 우리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남들이 혐오하는 것은 우리도 혐오하려고 노력함.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한 노력(특히 대중)을 야심ambition이라 하고, 우리를 만족시킨 사람을 떠올리며 느끼는 기쁨을 찬사praise라고 함. 타인의 칭찬 없이 우리가 원인이 되어 기쁨을 느낄 때는 자기 만족self-esteem이고, 우리가 원인이 되어 느끼는 슬픔은 후회repentance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사랑하면 우리의 사랑은 깊어지지만 다른 사람이 그것을 증오하면 마음의 동요를 느낌.
-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질에 맞춰 살아가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동일하게 원할 때 그들은 서로에게 비슷한 장애물이 되고, 모두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사랑받고자 할 때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게 된다." (3부 정리 31 주석)
- 우리가 겪는 슬픔에 대해 그 원인이 필연적일 때보다 자유로운 것이라고 생각될 때 우리의 증오는 더 커짐. 애완동물이 우리에게 끼친 피해보다 다른 인간이 끼친 피해에 대해 더 큰 분노를 품고 대함.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면 다른 사물들과의 인과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대상 하나에 증오를 집중할 수 없음. "사람들은 자신들을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물에 대해서보다 서로에 대해 더 큰 사랑이나 증오를 품는다." (3부 정리 49 주석)
- 신은 영원불변하므로 더 크거나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변이를 겪을 수 없음. 그런 점에서 신에게는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음. 그러므로 사랑이나 증오의 욕망도 있을 수 없음. 그래서 신은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음. 그러므로 신은 사랑의 대상도, 미움의 대상도 될 수 없음. 신은 영원히 적합한 관념이며, 영원히 능동임.
- 고독을 견디며 삶을 풍요롭게 만든 경험이 없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기쁨이나 슬픔이 오직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요동치게 됨. 스스로 기쁨을 만들 수 없는 예속 상태. "무능력은 인간이 자기 외부에 있는 사물에 의해 지배되고, 자기 본성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사물들의 일상적 조건이 요구하는 것을 하도록 결정되도록 하는 데에 있다." (4부 정리 37 주석 1)
- "감정이나 풍문에 의해서만 인도되는 사람과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과의 차이. 전자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자신이 대부분 모르는 것을 행하는 반면, 후자는 다른 사람의 소망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따르고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들을 행하며, 따라서 매우 위대하게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전자를 노예라 부르고, 후자를 자유인이라 일컫는다." (4부 정리 66 주석)
- 무지 속에서 기쁨이나 슬픔을 맞이하고, 그런 감정에 의해 촉발된 코나투스를 막무가내로 폭발시키는 것이 노예라면, 적합한 인식 속에서 슬픔을 피하고 기쁨을 맞이하려고 노력하는 자는 자유인임.
-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사는 한, 인간의 본성에 좋은 것들만을, 즉 모두에게 좋은 것들만을, 즉 각각의 인간들의 본성에 일치하는 것들만을 행한다." (4부 정리 35 증명) 자유인의 삶은 더 많은 기쁨과 사랑과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삶임.
- "현자는 현자로서 고찰되는 한 정신적으로 결코 고통받지 않고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자신과 신과 사물을 인식하며, 존재하기를 멈추지도 않으며 항상 정신의 참된 평화를 소유한다. 이런 상태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제시한 방법이 지금 매우 어렵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발견될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드물게 발견되는 것은 틀림없이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구원이 손에 잡혀 큰 노력도 없이 발견될 수 있다면 어찌 모든 사람이 그것을 무시했겠는가?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문 만큼 어렵다." (5부 정리 42 주석)
- "어떤 감정도, 단순히 참인 한에서 선악에 대한 참된 인식에 의해서는 억제되지 않으며 그 인식이 감정으로 간주되는 한에서만 억제된다." (4부 정리 14) 옳음이라고 판단한 것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우리 신체에 강력한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어야 함.
- "계율은 오직 이성과 자연적 지성의 가르침을 충분히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제공"됨. 수학공식이 발생되는 과정을 모르는 한 암기해야 하고, 암기했다는 것은 명령처럼 따라야 한다는 말임.
- 공동체 없는 이성은 존재할 수 없으며, 홀로 가는 고독의 길은 이성의 길이 아님.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만 살아가는 고독 속에서보다 공통의 결정에 따라 살아가는 국가 속에서 더 자유롭다." (4부 정리 73)
- 하지만 국가는 이성 상태가 아님. 국가는 예비적 단계로서만 존재. 보상이나 형별의 위협으로 설득될 수 없는 것들이 있음. 부분이 전체보다 크다든가, 유한한 무한이 있다든가,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라든가 등. 국가의 권리를 넘어선 곳에 개인의 고유한 자연권이 있고, 그 자연권의 구현은 오직 이성 상태에 도달하는 것에 의해서만 온전히 이뤄짐.
- 타인이 비난하면 슬픔이나 분노를 느끼는 까닭은 그 비난으로 인해 우리가 정신에 대해 긍정하기보다는 부정하게 되고 정신의 인식능력이 감소되는 상태를 표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임. 슬픔은 인식능력의 감소 속에서 자기 정신에 대한 부정, 즉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으르게 하고, 기쁨은 자기 정신에 대한 긍정, 즉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하게 만듦.
- 공동체는 부적합하고 우연적인 만남에 의한 슬픔의 기회를 차단하고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는 더 유리하고 적합한 대상과 만날 기회를 더 많이 획득하게 하는 수단.
- 정념은 우리가 그 감정을 원인에 의해 파악하지 못하는 부적합하고 혼란스러운 관념. 만약 원인과 적합하게 연결할 수 있다면 감정은 맹목적인 수동성의 힘을 상실함.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로 크나큰 슬픔을 겪었을 때, 우리가 그 존재를 상실한 사건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 존재를 보존할 방법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슬픔은 감소함. "상실된 선에 대한 슬픔은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이 선을 어떤 식으로도 유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약해진다." (5부 정리 6 주석) "정신이 모든 것을 필연으로 이해하는 한 감정에 대해 더 많은 지배력을 갖게 되거나 그 감정에 덜 지배받을 것이다." (5부 정리 6)
- 적합한 인식에서 생기는 감정은 정념보다 더 지속적이고 일관적이라는 점에서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짐. 이성적 인식은 필연적 인식이기 때문에 외부 사물의 변동에 의해 변하지 않는 지속성과 힘을 가짐.
- 생활의 규칙을 정할 것. 올바른 생활 규칙이나 일정한 생활 지침을 구상해서 기억에 새길 수 있으면 사건을 마주칠 때마다 적용할 수 있음. 누군가의 불법 행위를 떠올리며 그 불법 행위에 사랑과 아량의 규칙을 연결하는 사고 훈련을 자주하면 실제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도 즉각적인 증오의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게 됨. 단 기쁨의 방식으로 감정의 규칙을 만들어야 함. 슬픔에 기반을 둔 생활의 훈련은 타인에 대한 증오를 숨긴 금욕이 됨. 탐욕스러우면서도 가난한 자들은 돈의 악용에 대해 비판하지만 자신이 돈을 갖지 못하다는 원망과 질시를 보여줄 뿐임.
- 악은 '결합'을 '해체'로 경험하는 우리 신체적 차원에 있음. 해체를 결합으로 간주할 수 있으면 악은 더 이상 악이 아님. 파도에 휩쓸려 죽음에 이를 때 파도와의 결합은 우리 신체의 해체이기 때문에 악의 개념을 형성. 파도와 신체의 만남이 연장의 차원에서는 자연의 법칙을 따른 합성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악으로서의 파도는 사라짐. 헤엄을 친다는 것은 바다의 리듬과 우리 신체의 리듬 사이에 어떤 공통성이 생긴 것임. 이 순간 바다와 우리는 하나가 됨.
- 어떤 인간의 배신에 대한 슬픔과 증오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 형성할 수 있는 공통성은, 동일한 사회 환경 속 인간이라는 것 뿐임. 그럼에도 우리의 슬픔과 증오를 덜어줌. 거대한 사회 기계 속에서 서로에게 적대적일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인식. 이런 보편 공통 개념을 통해 함부로 인간을 믿지 않게되고, 친절과 애정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쉽사리 호의를 베풀지 않고, 헛된 사랑에 넘어가지도 않게 됨.
- 자유는 매순간 합성의 관계를 구체적인 대상과 함께 형성하는 것이지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님. 직장이나 어떤 공동체에서 힘겨움을 느끼는 이유는 공통성이 형성되지 않은 관계가 부자유와 슬픔을 주기 때문임. 우리 삶에서 형성해야 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의 공통성임.
- 공통 개념은 구체적인 수준에서 형성되어야 함. 이 사람과 형성한 공통 개념이 저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음. 이 사람과 함께할 때 누리던 자유가 저 사람과 함께할 때는 제약으로 다가올 수 있음. 공통 개념을 최대로 확보하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만날 때도 슬픔과 증오의 계열 속으로 빠져들지 않게 됨. 우리가 다른 신체와 합성되지 못했다는 사실과 불일치의 이유를 더 많이 생각하려 하고 이해하려 하기 때문임. 이것이 원인에 의해 인식하는 것이고,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는 것임.
- "한 신체가 다른 신체와 공통적인 것을 많이 가질수록 정신은 많은 것을 적합하게 인식하는데 더 유능해진다." (2부 정리 39 보충)
- 공통성을 형성하지 못하고 타인과 있으면 불화 속에 빠짐. 이렇게 공통성 형성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만이 고립된 삶을 자유라고 여기며 자유라는 개념을 오용함. '개인'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연적 단위가 아니라 실패의 경험이고, 공동체가 와해되는 시련 후에 남은 찌꺼기임.
-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공통성을 형성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노력해야 함. 우리가 고립될수록 추상적인 인식(가장 보편적인 공통 개념이나 수학적 지식)이 지배하지만 함께 공통의 리듬을 찾아갈수록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공통 개념들이 증가함.
- 칼과 우리 신체 사이에 공통성을 형성하라면 칼의 리듬에 맞춰 신체를 변화해야 함. 운전을 하려면 자동차의 리듬에 맞춰 변해야 함. 공동체도 마찬가지임. 자유는 고립이나 도피가 아니라 변신을 전제함.
- 삶의 모든 현장에서 자유로운 삶의 능력을 보일 수는 없음. 우리가 형성한 공통성 속에서만 자유롭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다시 수동적 정념과 1종 인식을 갖게 됨. 거기서 다시 공통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 그래서 또다시 자유롭고 능동적인 존재가 됨.
- 공통 개념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와 적합한 관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말이 됨. 적합한 관계를 구성하면 적대하지 않고 늘 이익을 주는 합성의 관계 속에 살게 됨.
- "3종 인식은 신의 속성에 대한 적합한 관념으로부터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적합한 인식으로 향하고, 이런 식으로 더 많이 사물을 인식할수록 신을 더 많이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신의 최고의 덕은, 즉 정신의 능력, 또는 본성 혹은 그 최고의 노력은 사물들을 3종 인식을 통해 이해하는 것에 있다."
- 공통 개념의 동심원을 넓혀갈 때,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타인의 본성과 다른 사물들의 본성이 일치하는 지점을 더 많이 확보하게 됨. 이때 우리는 전체로서 자연의 질서에 대해 전체적인 지식을 형성하게 되면서 자기중심의, 그리고 인간중심의 '악'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앨 수도 있음.
- 신 안에 있는 그대로의 기쁨, 신에 의해서만 경험되는 기쁨, 지복이라는 기쁨. 이것이 바로 신에 대한 지적 사랑임. 3종 인식을 통해 만물의 원인으로서 신을 인식하게 될 때마다 우리에겐 기쁨이 솟고, 이 기쁨이 신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때 그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 됨. 신에 대한 사랑은 오직 이성적인 방식으로만 가능. 신이 파악하는 그대로의 관념을 갖는 3종 인식에서 비롯되는 신에 대한 인간의 지적인 사랑은, 신에 대한 신 자신의 사랑이자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동일함. 사랑은 계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총체적 적합을 향한 구체적인 경험과 공통 개념의 형성, 3종 인식의 형성 속에서 가능한 최고의 이성적 실천임.
[3] 질문
- 자유인과 노예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인과 관계의 사슬 속에서 우리는 자유인이거나 노예이기를 선택할 수 없다.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 조차 그것이 정해진 운명이 아닌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4] 적용
- 현재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공통성 형성하기
- 주변 사람, 생물, 사물과 구체적인 공통 개념 형성하기
- 매순간 주변의 바다와 파도를 인식하기
- 생활의 규칙 지키기
- 기쁨의 방식으로 사고 훈련하기
[5]
-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직 불명확한 부분들이 있지만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면 명확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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