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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영국

영국 옥스포드 헬프엑스 마감: 지옥의 밤과 과대요리 (여행 200일째)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끝까지 저 똑바른 길을 걸어가려고 애쓴다. 길을 반쯤 가다가 기운을 잃어버리는 것, 그것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한다.
- 중국 금언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2017년 2월 3일 금요일

영국 옥스포드(Oxford)

[1] 지옥의 밤: 어젯밤 영감님은 어깨 통증 때문에 신음하면서 잠 못들어 하더니, 계속 침실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했다. 나는 괜히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꼼짝 않고 누워서 자는척 했다. 깨어 있으면서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일이었다. 잠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영감님의 뒤척거리는 소리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잠이 오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내가 지옥에 떨어져 실시간으로 벌을 받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절망적으로 길고 괴로운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물어보니, 신기하게도 영감님은 몇 번 깼지만 푹 잘 잤다고 한다. 

[2] 오늘의 잡무: 오늘도 사바사바 모드로, 영감님이 뭘 시킬 때는 싹싹하게 하고, 안을 때는 나도 토닥토닥 해 주면서, 기분 좋게 넘어갔다. 아침에는 2층 손님방 침구류 준비를 했고, 유니온 스트릿(2번집)을 떠나 튜더 클로즈(1번집)에서 영감님과 마지막 산책을 했다. 점심으로 리크(큰 부추같이 생긴 채소) 수프와 치즈 토스트를 먹었다. 오후에는 영감님과 친하게 지내는 네팔 사람과 같이 테스코 24시에 가서 닭가슴살 네 덩이를 사왔다. 이 네팔 사람은 몇 년 째 맥도날드에서 일하고 있는데,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아이도 2명이나 키우고 있다고 한다.

[3] 과대요리: 오후에는 할일이 없어서, 일찍부터 저녁에 먹을 카레 준비를 시작했다. 아까 사 온 닭가슴살을 올리브 기름에 볶고, 노란 카레가루 1/2 작은 술, 또 다른 가루 1+1/2 작은 술, 조그만 절구로 3가지 향신료를 곱게 갈아서 넣고, 옥소(Oxo) 조미료를 녹인 물, 삶은 당근과 감자, 버터에 볶은 양파, 토마토, 생강과 마늘, 고추, 요거트 2 큰 술을 넣는다. 정말 많이도 넣는구나. 카레와 별도로 달(dal, 인도 콩요리)도 요리했기 때문에 가스레인지 4개를 동시에 돌리며 밥도 지었다. 이렇게 난리법석을 떨지 않고 간단하게 채소, 과일, 빵, 수프 정도만 먹어도 일이 정말 많이 줄어들고 시간도 많이 남을텐데!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요리는 시간을 죽이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인 것 같다. 

[4] 마감: 마지막 날! 감사하게도 훌륭하게 잘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다시는 안 올 것 같다) 어찌어찌 2주를 버텼다. 장하다. 돈 때문이기도 했고 (하루에 20파운드씩 내면서 호스텔에 묵을 수는 없으니), 외로워하는 영감님이 불쌍하기도 했다. 영감님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암튼 끝이다. 인생의 끝에서도 이렇게 후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 런던으로, 그리고 브라질로... 

1번집과 2번집을 오가며 지나치던 아름다운 늪지대

옥스포드 대학교 공원의 오리들

영감님에게 빌린 외투를 입고 오리 사진을 찍는 나를 보고 있는 영감님

내가 (모로코에서 주워 와서) 선물한 조개껍데기를 화분에 장식한 영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