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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브라질

브라질 해돋이 농장: 눈먼 암탉, 바나나 껍질, 물병자리의 시대 (여행 249-252일째)

2017년 3월 24일 금요일

오후에 시몬이 떠났다. 앞으로 어떻게 공사를 진행할지 지시를 받았다. 줄리아노가 드릴을 사용하다가 날을 두 개나 부러뜨려 버려서 더 이상 쇠파이프가 들어갈 만큼 넓은 구멍을 뚫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쇠파이프보다 좀 더 얇은 철근을 대신 사용하기로 했다. 구멍 위치가 서로 맞물리도록 정확한 길이를 재야했는데, 나무가 곡선이기 때문에 정확한 계산이 어려웠다.

V자 모양 팔찌와 드림캐쳐를 만들었다. A4용지로 새 일기장을 만들어 겉표지에 그림을 그렸다.


2017년 3월 25일 토요일

지미가 그렇게나 놀아달라는데, (귀엽지만) 귀찮아서 조금 놀아주다가 말았다. 작은 집을 짓는 법을 알려달라고 해서 같이 뭔가 해보려다가, 제대로 된 망치가 없어서 조금 뚝딱거리다가 관뒀다.

포만감, 재미있는 책과 이야기, 창의력을 쏟아낼 수 있는 일거리, 신비로운 새들, 귀엽고 정다운 동물들과 아이들, 평화로운 풍경. 이렇게 더 바랄게 없는 (모기가 좀 괴롭혀도) 환경이지만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이유는 뭘까.

아직도 휴일은 (무겁게) 하루나 더 남아있고, 프란체스코는 빵 구울 준비를 하고, 줄리아노는 지미와 마리오 게임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뭔가를 그리거나 적고 있다. 일주일 째 인터넷이 안되는 게 한가함을 더해준다.


2017년 3월 26일 일요일

어젯밤 엔지와 프란체스코가 화장실에서 샤워기를 틀어놓고 사랑을 나누며 내는 웃음소리와 신음소리가 귀에 거슬리면서 문득 이곳을 떠나고픈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안 되는 지금 상황에서는 다음 장소를 찾기가 힘들다. 오늘 아침에도, 이 모든 안정감과 포만감에도 불구하고, 길을 떠나고픈 충동이 들었다. 모르는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고 싶다. 한국 이야기, 전통, 음악, 사람들이 그립다.

아침에 풀을 베어서 닭장에 넣어주는 작업을 하던 중에, 다른 닭들에게 쪼여서 피가 흐르는 머리를 깃털 속에 파묻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는 하얀 암탉을 발견했다. 줄리아노가 다친 암탉을 안아 들고 프란체스코에게 보여주니, 눈이 멀었다고 한다. 이 눈먼 닭의 모습은, 삶이 그저 웃음과 행복으로만 가득한 꽃길이 아니라는 걸 상기시킨다. 그래서인지 항상 음식을 많이 먹고, 사람들을 꽉 안아주고, 사랑하고, 소리 내어 웃는 엔지를 보며 의문이 든다. 그 웃음과 행복의 무게에 상응하는 ‘추’로 과연 무엇이 저울의 반대편에 매달려 있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잘 먹고 잘 웃고 잘 사랑할 수 있다면 좋은 거지.

다이앤과 한국영화 얘기를 하고(호랑이 잡는 사냥꾼, 두 소녀의 대화), 포르투갈어를 공부했다.

저녁에는 줄리아노와 같이 만디오카를 만들어 바나나와 갈색 설탕을 넣어 먹었다. 나비가 발치에 와서 잔다.


2017년 3월 27일 월요일

점심에는 마리네즈가 바나나 껍질로 만든 요리를 먹었다. 처음으로 먹어보는 바나나 껍질.

뜨겁고 진한 커피에 뜨거운 물을 약간 부어 마시며 일기를 쓰는 한가한 오후. 왠지 뭘 해도 아쉬운 일요일 오후에 비해, 아침부터 열심히 일하고 맞이하는 월요일 오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프란체스코와 엔지는 열심히 천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SkyView’라는 앱으로 달의 위치 및 경로와 12궁도의 위치를 비교해보며 언제 과일, 꽃, 곡식 등을 심는 것이 좋은지, 어떤 날이 어떤 원소(물, 불, 바람, 흙)를 대표하는지를 배웠다. 학교에서 천문학을 가르쳤었다는 줄리아노는, 컴퓨터에 설치된 'Stellarium'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왜 기원전 2000년 동안이 양자리(Aires)의 시대였고, 그 후 지금까지는 물고기자리(Pisces)의 시대이고, 그 후에 물병자리(Aquarius)의 시대가 오는지 확인해 주었다. (3월 21일 춘분의 태양 위치를 각 년도별로 비교해 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도와주니 통나무 10개를 지붕에 올리는 작업이 반나절 만에 여유롭게 끝났다. 일하는 게 훨씬 쉽고, 노는 것처럼 재밌다. 작업 내내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타잔처럼 밧줄을 잡고 지붕에서 뛰어내리다가 가랑이가 밧줄에 끼어버렸다.) 프란체스코는 기둥 위에서 능숙하게 지시를 내렸다. 마치 영화 <위트니스(Witness, 1985)>에 나온 아미시(Amish) 마을의 집짓는 장면처럼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이앤은 그 다음 작업까지 진도를 나가고 싶어 했다.

그밖에도 나무(유칼립투스) 두 그루를 베고(전기톱 나사를 잃어버림), 물을 뚝뚝 흘리는 나무 두 그루의 껍질을 벗겨 지붕으로 올렸다.

아침에는 어린 바나나 나무 하나를 줄기째 베어 닭들에게 줬다. 피 흘리던 눈먼 닭은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다. 줄리아노가 “누가 잡아먹은 것 아니야? 찾아보자-”고 해서 닭장의 안과 밖을 싹싹 뒤져 보았는데 못 찾았다. 그러다가 다른 닭들이 방 안에서 쉬게 해주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반대편 어두운 구석을 보니, 하얀 물체가 보인다. 새벽에 닭똥 치울 때는 못 봤던 눈먼 닭의 사체다. 다리 하나를 잡아들고 있는 동안(앞으로 닭다리를 뜯어야 할 경우가 생기면 이 느낌을 기억하자), 줄리아노가 프란체스코에게 가서 얘기하고 왔다. 거름 만드는 곳에 묻기로 했다. 죽음 뒤에는 평화가 있구나. 축축하고, 아프고, 어둑하던 어제의 눈먼 닭이, 이제는 딱딱한 형체만 남아 밝은 태양 아래에서 묻히고 있다.


(사진은 2017년 3월 19일)


자파카

마을 공동묘지

지미의 자전거 연습

발아실의 새싹들

루꼴라

건축 작업

화덕과 불쏘시개

물안개에 덮힌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