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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전기

류영모가 대학 진학을 포기한 까닭은 종교 사상에 있었다.

세상의 입신양명이니 이런 것은 다 집어치우고 진리 속에 들어가는 것만이 참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이 걸어오십니다.
대학, 대학 하면서 대학에 가면 문제가 해결될 것같이 생각하는데 대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옛날에도 좋은 음식, 좋은 집, 출세 따위가 권학의 조건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박사 논문을 쓴다는 것은 빌어먹을 짓입니다.
출세하여 대학 교수가 되려고 하는 것은 일하기 싫어서 그러는 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에도 교만한 자는 일하지 않고 밥 먹으려 한다고 말했어요.
지식을 취하려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보자, 대우받자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양반 사장, 관존민비 사상입니다.

148 아무런 지위도 없고 아무런 소유도 없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자는 것이 예수와 석가의 생각이었다.
류영모는 빌어먹는 거지보다는 이마에 땀 흘리며 사는 농부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알았다.
톨스토이가 이상적인 인물로 그린 바보 이반이 되자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결론은 이렇다.
"남에게 나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나의 정당, 우월, 특권을 거부하여야 한다. 어떠한 노동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나와 다른 이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하는 것이다."

인격이 온전하다면, 누구를 의지하거나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똥오줌을 가누게 되고, 남녀 문제를 초월하고 생사 문제까지 초월하게 됩니다. 

180 나는 자식들이 아파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이 있어서 그러려니 합니다. 다른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세상에 와서 그 짓을 하지 않았다면 자식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가 없어지면 어떻거나 큰일 날 줄 압니다.사람이 없으면 무슨 걱정입니까? 

194 류영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회 신앙에 만족하는 것을 두고 한 번도 비판한 일이 없었다. 바울로의 교의 신앙에 열중하는 어버이에게 교의 신앙을 초극(超克)한 고차원의 자각 신앙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자신의 정신적 높이대로 믿는 것이다.

어떤 인생관도 제 인생관이지 남에게 꼭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이상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꿈을 깨자고 꾸는 꿈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교회 신자로 오인되는 것은 경계하였다. 

199 섭섭한 것이나 반가운 것이나 어떤 면에서는 같습니다. 근원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떠나서 섭섭할 것도 없고 만나서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모른다고 하면 모르는 것을 탓하며 아주 야단을 합니다. 인사치레 잘하는 사람은 감정의 몇 곱절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다른 이들은 그 사람이 인사를 잘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아힘사의 사상을 가진 이라도 악한 사람을 보면 금방 죽이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참으로 선을 알고 악을 없이 하겠다는 사람은 살생을 하지 않습니다. 독사나 맹수조차도 죽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것들이 놀라지 않을까 조심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있는 것도 다 하느님 뜻인줄 알고 살생을 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을 보면 당장에 죽일 것처럼 날뛰는 사람이 악을 가장 싫어하는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죄악을 범하기 쉬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냉정해야 합니다. 무아의 지경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남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직도 선을 위해 무엇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면 자기도 악당이 되고 맙니다. 악은 하느님의 뜻이 악을 없애야겠다면 없어질 것이고, 있어야겠다면 있습니다. 무조건 선이라야 합니다. 무조건 선이 아니면 그것은 악이 됩니다.

219 방에도 방석 대신 널판지를 깔고서 앉았다. 교장실에 있는 회전의자를 치우고 보통 의자의 등받이를 잘라버리고,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집무하였다. 음식은 하루에 두 끼니만 먹었다. 그때는 아직 하루 한 끼니 먹기를 하지 않았던 때다. 그리고 절대로 과식하는 일이 없었다. 물론 술과 담배는 안 했다. 날마다 냉수 마찰을 하였는데 아무리 추워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감기가 먼저 알고 감히 류영모에게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오늘
여기 또 다른 파란 새날이 밝누나
조심하라 어물쩍 하릴없이 보내지 않도록
이 새날은 영원에서 태어났느니라
밤이면 다시 영원으로 돌아가노라
미리 만나라 아직 아무도 못하였지만
모든 이의 눈에서 곧 영원히 사라진다
여기 또 다른 파란 새날이 밝는다
조심하라 어물쩍 하릴없이 보내지 않도록

세상에서는 하루살이, 오늘살이라 하면 재물을 벌어서는 허랑방탕하게 마구 써버리는 사람의 생활 태도를 일컫는다. 그것은 하루살이도 오늘살이도 아닌 마구살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살이, 오늘살이는 하느님의 아들인 성인들의 삶이다. 예수가 이르기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오 6:34) 이것이 하루살이요, 오늘살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오늘 하루 나를 이겨 참나의 삶을 산다(一日克己復禮)"라 하였으며 "오늘 하루 어짊에 힘을 다한다"라 하였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

경제 관념은 이렇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더 바라지 않는 마음의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몸이 성하면 그만입니다. 몸이 성하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마음은 놓아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하느님의 성령인 진리를 담기 위하여 비우는 것입니다. 몸살림은 겨우겨우 사는 것이 가장 잘사는 것입니다.

588 참회하는 함석헌에게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냐고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그 동안에 톨스토이를 두고 괴테를 읽어보았습니다." 이 말이 류영모에게 충격적으로 들렸다.

594 사랑과 죄악으로 뒤범벅된 것이 어찌 구원이 된단 말이요. 구원이란 탐진치의 삼독의 욕심에서 벗어나 진리로 자유(해탈)하는 것이 구원일 것이오. 그래서 예수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어요. 일찍이 석가는 '온갖 걸림에서 벗어나라'고 했습니다. 온갖 유혹에서 벗어나 헤매지 않으려면 자각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진리의 나를 깨달으려면 먼저 모든 욕심을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하는 데 제일 힘드는 것이 식색(食色)입니다. 색이 강한 듯 하지만 사실은 더 강한 것이 식입니다. 색욕은 60살이지나면 저절로 물러서지만, 식욕은 숨질 때까지 끌고 갑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의 몸을 공경하여 일평생 시험에 빠지는 일 없이 건강과 정결을 지켜야 한다. 음식과 남녀에 지면 곧 병신이 되고 등신이 되어 죽게 됨이, 마치 서리가 내리면 얼음이 어는 것과 같다. 음식과 남녀에 이긴 사람만이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새벽에서 저녁까지 살아갈 수 있다. 식욕과 색욕에 끌려다니면 인생은 무의미하고 신세를 망치게 된다. 식색을 삼가면 자신이 행복해지고 나라가 행복해진다.

311 삼각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뼈를 심하게 다쳐 누워 앓으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남녀의 정사를 쾌락이라지만 실은 고통이요, 죽음을 고통이라고 겁을 먹지만 좋은 맛임을 깨달은 것이다.

사람의 살림이라는 것이 몸뚱이의 자질구레한 일로 보내는 것이 생활의 대부분인데 어찌하면 하느님의 성령과 함께 하는 참된 삶을 살 수 있을까? 몸이란 마침내 큰 짐이요, 감옥이요, 못된 장난이다.

316 하느님은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존재이시다. 하느님은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는 무한한 존재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생사를 넘어선 얼의 존재이시다. 하느님은 애증을 넘어선 사랑의 존재이시다. 하느님은 희비를 넘어선 기쁨의 존재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나를 죽이고 하나님에 이르면 말씀이 쏟아지고 사랑이 샘솟고 기쁨이 넘친다.

"하느님이란 이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하느님은 곧 나의 생명이다. 하느님을 찾아서 살자. 그러면 하느님이 없는 생활은 없다. 이렇게 깨닫자 나의 속마음은 물론 밖의 모든 것이 이제까지보다 훨씬 광채를 띠고 나타났다." (톨스토이, 참회록)

류영모가 말하기를 "기도하는 가운데 전 허공계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이 잘못을 헤치는 데는 하나님의 성령 없이는 불가능인 것을 알았습니다."(부르신 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라고 하였다.

318 말씀과 사랑과 기쁨의 하느님에 이르렀는데도 말씀도 없고,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는 아직 하느님께 이르지 못한 것이다. 류영모는 말씀과 사랑과 기쁨으로 일생을 살았다. 

수학 문제 하나를 풀어도 기쁜데 인생 문제가 풀렸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앓던 병이 나아도 기쁜데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만나도 기쁜데 하느님 아버지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과는 다르다. 으스대고 뽐내며 방탕한 삶을 살면서 행복하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멸망의 넓은 길을 가는 것이다. 거기에 사제들의 입에서 행복 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마귀의 소리가 될 뿐이다.

류영모는 참나를 깨닫고는 성격에 변화가 왔다. 모난 듯하던 것이 둥글어지고 찬 듯하던 것이 따스해지고 고집스럽던 것이 너그러워졌다. 원융무애(圓融無礙)에 이른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성공한 삶의 참 증표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의 자람이다." 부드럽고 너그럽지 못한 신앙은 죽은 신앙이요, 거짓 신앙이다.

일일일식(一日一食)의 삶 40년
적게 먹고 편히 살 수 있는데도 많이 먹고 배탈을 내서 고생을 합니다. 식사(食事)는 말하자면 먹거리의 장사(葬事)입니다. 우리의 입이란 열린 무덤이라 식물 동물의 시체가 들어가는 문입니다. 
산 것이란 짐승만이 아니요, 물고기만이 아닙니다. 풀 한 포기도 살려는 생물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루 종일 산 것을 너무 많이 잡아먹습니다. 들입다 먹고는, 냅다 붙인다면 걸차게 들리고 신나는 듯하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더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먹을 때에 먹어야 합니다. 때 없이 먹어서는 안 됩니다. 위(胃)는 우리의 밥그릇으로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온 도시락인데 못쓰게 해서는 안 됩니다. 
끄니(끼니)는 끊어야 하는데 잇기만 하려고 합니다. 끊는 것이 먼저이고 잇는 것은 나중입니다. 
석가는 한낮에 한 번만 먹어 일중(日中)이라 합니다. 하루 24시간에 한 번 먹는다고 해서 점심(点心)이라고 합니다. 먹는 둥 마는 둥 마음에 점을 친다고 해서 점심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루에 한 끼씩 먹어보니 몸 성한 비결은 점심에 있습니다.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 온갖 병이 없어집니다. 모든 병은 입으로 들어가는 데서 생깁니다. 감당 못할 음식을 너무 집어넣기 때문에 병에 걸립니다. 사람은 안 먹으면 병이 없습니다. 욕심을 줄여서 한 점을 만드는 것이 점심입니다. 그것은 석가가 오랫동안 실천한 건강법입니다. 이 육신은 물질이라 멸망하지만 건강하여 영원한 생명(얼나)을 받들면 꽤 부지해 갑니다.

346 류영모는 51살이던 1941년 2월 17일부터 하루에 저녁 한 끼니씩만 먹는 일일일식을 시작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얼굴이 수척해지면서 누렇게 변하였다. 석 달이 지나자 여느 때의 안색으로 돌아왔다. 그 석 달이 고비였다. 그 뒤로는 하루에 한 끼씩 먹고도 활동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몸이 더 가벼웠다. 류영모는 일일일식에 자신이 섰다. 그리하여 벽제 뒷박고개 너머 고양과 의정부 경계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까지 걸어서 다녀오기로 하였다. 왕복 약 40킬로미터가되는 100리 길이다. 그때는 5월이라 해가 짧지 않아 당일로 거뜬히 다녀왔다. 아침이 밝자마자 집을 나서서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왔다.

"채식주의자들이 '짐승인들 살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먹으랴'라고 하는 생각은 참 좋은 생각이다"라고 하였다. 톨스토이와 간디가 주장한 채식주의 정신을 지지하는 말이다. 육식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금기하지는 않았다. 

맛으로 사는 이는 식사나 방사(房事)를 호기욕(好奇欲)의 대상으로만 여겨서 육체적 본능의 욕구를 만족하고 향락하는 기회로만 삼습니다. 그리하여 그 틈을 타고 싶고, 꾀를 부려 얻고자 미칩니다. 맛으로 살려는 이는 짐승이 되어 꿈틀거리는 꼴을 그려보고 미칩니다.
어떤 이는 대접으로 술을 하라고 하고, 맥주로 하라고 하고, 사이다 생각도 없다면 차를 마시라고 하고, 냉수라도 마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냉수도 안 마셔야 합니다. 목이 자주 말느 이는 목마른 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줄곧 먹어서는 안 됩니다. 끊었다가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정한 것도 몇 날이 못 가서 그대로 못하고 맙니다. 
몸이 제멋대로 설치지 않게 하려면 몸을 알맞게 절제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단식을 하고 단색을 하여야 한다. 그래서 류영모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돌아갔을 때에도 5일 동안 단식을 하였다. 기일에는 제사 의식 대신에 그날 하루 동안 금식하면서 추모하였다. 친지가 세상을 떠나 조상을 하는 날도 단식을 하였다. 그밖에 신앙의 이유로 5일, 7일, 11일 동안 여러 차례 단식을 하였다.

류영모는 러셀과는 반대로 정사를 쾌락으로 아는 것은 어리석음이요, 죽음이라고 하였다.
마하트마 간디가 부부 사이에 금욕하는 길을 일러주었다. 첫째, 마음의 결심이 있어야 한다. 둘째,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 셋째, 부부가 각각 다른 방을 쓰는 것이 좋다.

나는 아내(妻)의 뜻을 '안해'라고 합니다. 남녀가 만나는 때의 뜻이 크다고 하더라도 일찍 성 생활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자꾸 계속하다간 저 혼자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인구 폭발로 인류가 망합니다. 남녀가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서로 정력을 낭비케 하여 상대의 생명을 갉아먹으면서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서로 좋으면 좋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가면 사람의 존엄성이 깨져 사람은 향락주의의 찌꺼기가 됩니다.

사람은 남녀의 맛이 아니라 남녀의 뜻을 읽어야 합니다. 남녀의 사랑이 종당에는 하느님의 사랑에까지 도달할 때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아이를 낳기 위해서만 만나고 언제나 따로 있어 기름(精力)을 소모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죽이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남자는 왈칵 쏟을 때 죽는 것입니다. 여자는 출산할 때 죽는 것입니다.

아내와 맺는 성교라도 만일 그것이 정신적인 사랑 없이 시기를 무시한 채 단지 육욕을 위한 것이라면 간음이라는 생각은 옳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출생을 목적으로 하거나 정신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아내와 이루어지는 성교가 죄라는 주장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는 죄가 아니고 하느님의 뜻인 것이다. (톨스토이 전집 18권, '남과 여' 이와나미 문고)

"나는 잘못된 사람을 보면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의 일을 생각한다. 호색한을 보면 나도 한때는 호색하였음을 생각한다. 이리하여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친숙함을 느낀다." (간디 문집)

"금욕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은 뚜렷하게 다르다. 금욕하는 사람의 눈은 하느님의 영광을 보지만 금욕하지 않는 사람의 눈은 둘레의 천박한 것을 본다. 금욕하는 사람의 귀는 하느님의 찬송을 듣지만 금욕하지 않는 사람은 지저분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금욕하는 사람은 밤에 기도를 하지만 금욕하지 않는 사람은 향락에 빠진다. 금욕하는 사람은 몸을 하느님의 성전으로 만들지만 금욕하지 않는 사람은 몸을 냄새나는 시궁창으로 만든다." (간디 자서전)

널판 위에 사는 두 가지 이유. 첫째는 자는 동안 등뼈를 고르게 펴려는 건강사으이 이유이고, 둘째는 널판 위에서 삶으로써 죽음과 친하려는 신앙상의 이유였다.
사람들은 푹신한 요나 침대 위에서 자기를 좋아한다. 그러면 등뼈가 제대로 곧게 펴지지 못한다. 그래서 의사들은 딱딱한 합판 위에서 자기를 권한다.

372 일찍이 말을 타고 사냥하기를 좋아한 톨스토이는 회심을 한 뒤에는 걸어 다니기를 좋아하였다.가까운 데만 걸어 다닌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야스나야 폴랴나까지 100킬로미터나 되는 곳을 몇 차례나 걸어 다녔다. 허름한 옷차림에 배낭을 메고 순례자처럼 걸었다. 걸어가다가 힘이 들면 시골 기차역 대합실에서 쉬었다.
톨스토이는 밤이면 농가나 여인숙에 묵었다. 5일이나 걸리는 먼 도보여행이었다. 몸이야 고달팠겠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길을 걸으며 님(하느님)을 그리면 마음에 기쁨의 샘물이 터진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우러르며 걸으면 더욱 신비를 느낀다. 승용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비길 바가 아니다.

431 예수와 석가, 톨스토이와 간디는 사유재산을 부인하고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므로 인류가 함께 나누어 써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될수록 아무것도 안 가지려 하거나 적게 가지려고 하였다. 이러한 자율적인 공산(共産)이 진짜 공산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타율적인 공산주의는 거짓 공산주의다. 그 사실을 실증한 것이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의 실상이다. 
톨스토이가 말하기를 "사회주의자에게는 사실상 사랑이 없다. 다만 지배자에 대하여 미움만 느끼고 있으며 유복한 사람의 달콤한 생활을 넌지시 부러워하고 있다. 그들은 배설물에 모여드는 파리 떼와 같은 욕망을 품고 있다."

472 이현필의 사상은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맡아서 하자는 것이었다. 중환자나 장애인 수발은 가까운 가족조차 싫어한다. 이현필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일을 하려고 요양원을 만들었다. 
세상 사람은 자신의 입신과 출세를 도모하여 어느 정도 재산을 모으고 지위에 오르면 성공하였다며 으스댄다. 그러나 개인의 성공이란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뿐이다. 개인의 성공이란 지나고 나면 물거품이요, 잠꼬대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사람인 우리의 성공인 것이다.

488 짓수(예술), 빈탕(허공), 살알(細胞), 환빛(光), 제계(天), 힘입(은혜), 그이(군자), 바탈(性), 바람울림(風樂), 몬(物), 고디(정조), 는지름(음란), 짬쨈(조직), 맞긋(종말), 덛(시간), 덜(악마), 긋(점), 조임살(罪), 속알(德), 읊이(詩), 예(여기, 상대 세계), 숨줄(생명), 다세움(民主), 외누리(독재), 님(生), 종싫(好惡), 옳음(義), 올(理), 굳잊이(건망), 누리(세상), 사람새(人間), 나위힘(능력), 땅구슬(지구), 몯돌(坤), 성큼(乾), 김(氣), 가온쓸(中庸), 얼(靈), 여름질(농사), 씨알(民), 낸감(제도), 뭉킴(협동), 밑일(기초공사), 굶고뱀(고학), 떼몸(조합), 맨듬(創造), 빛골(光州), 잎글(엽서), 씨볼맞이(인연), 키임(긴장), 뫼신살이
(侍下), 등걸(檀君), 그늠(無漏), 가라치킴(교육), 잘몬(萬物), 싶뜻(욕심), 푸른나이(청년), 우리오리(倫理), 늙은이(老子), 말씀마루(宗敎), 조히(無故), 한늘(우주), 맘줄(心經), 다섯 꾸럼이(五蘊), 꼴위(形而上), 아래(形而下), 맨지(접촉), 엉큼(마하트마), 씻어난이(聖人), 딱아난이(眞人), 없귻(無極), 어둠맺이(혼인), 같이늙(偕老), 맘아들(弟子), 여름아비(農夫)

사나이(산 아이), 고맙다(고만하다), 깨끗(끝까지 깨다), 모름지기(모름은 꼭 지키는), 더욱(더 위로), 실어금(실어갈 금), 하여금(할금), 끈이(끊었다 이음), 사람(사리는 이), 엉큼(얼이 큰), 말미암아(그만하고 말아서), 성큼(성하고 큼), 어버이(업을 이), 이튿날(이어트인 날), 아침(아 처음), 칼(갈고 갈은), 여덟(열에 둘 없는), 아홉(아 없는), 열(열리는), 얼굴(얼이 든 골자구니)

530 사람 사이를 계산하고 따지는 것은 사람의 운명을 캄캄하게 합니다. 사람 사이는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씨알(民)을 위함이 하느님을 위함이라 씨알을 모른다면서 하느님만 섬긴다 함도, 하느님을 모른다면서 씨알만 위함다 함도 거짓입니다.

532 무명 한복만을 입었다.
하루에 소찬의 저녁 한 끼니만 먹었다.
일생 보신을 하거나 보약을 먹은 일이 없고 약국이나 병원에 드나들기를 싫어하였다.
호화로운 가구란 없었으며 집에서 직접 만든 낮은 책상을 썼다.
천가방을 들고 다니고 가죽 가방을 산 적도 없다.
머리는 집에서 삭발하여 이발소를 몰랐고, 냉수 마찰을 하니 목욕탕을 몰랐다.
남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고 손수 하였다.
시내는 물론 웬만한 먼 곳도 늘 걸어 다녔다.
자녀의 혼인 예식도 집안에서 간소하게 했으며 생일 잔치, 환갑 잔치는 안 했다.
언제나 국산을 쓰고 수입품을 쓰지 않았다.
"사람 다스리고 하느님 섬김에는 아낌만 한 것이 없다"(노자 59장)

물자를 소비하면서 산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못사는 것은 정신으로 삼독이 후퇴해서 못사는 것이지 결코 소비가 적어서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소비를 많이 하는 나라가 잘사는 나라라는 생각으로는 이 세상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정신을 향상시키는 것이 잘사는 것입니다. 소비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외제보다 국산으로 살아야 하고, 인위보다 자연으로 살아야 합니다.

안빈이낙도(安貧而樂道)란 멸망의 생명인 몸나는 겨우 살면 되고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기뻐하는 것이다.
주급불계부(周急不繼富)란 급한 사람에게는 돌려주지만 잘사는 이에게는 더 이어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으는 데 힘써 물질은 잔뜩 쌓아 자기 혼자만이 잘살려는 약은 수단과 어리석은 짓은 싹 치워버려야 합니다. 나도 한번 모아보자 그래서 떵떵거리고 잘살아보자 하게 됩니다. 이따위 우상 숭배는 사라져야 합니다. 돈을 모으면 자유가 있는 줄 아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돈을 모을수록 더욱 매입니다. 사람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지옥이 따로 없고 주지육림이 지옥입니다. 같은 사회 속에 살아도 그 관(觀)이 다르면 다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노동자 복장을 하고 밖에 나가라고 하면 나가겠지만 부자의 차림을 하고는 밖에 못 나가겠습니다. 다 관이 다르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이 참되게 살려면 가난한 서민으로 겨우겨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말하였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16:15)

남을 이기는 것은 나와 남을 죽이는 일이요, 나를 이기는 것은 승리요 생명입니다. 참을 찾아 올라가는 길이 나를 이기는 승리의 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평생을 두고 지나가는데 마침내 참나를 찾아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될 것입니다. 본디 하느님께서 내게 찾아준 분량을 영글게 노력하면 반드시 사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몸을 가졌으면 서로 도와서 살아가야 합니다.

551 톨스토이와 간디는 스스로 죽음을 당하겠다고 하였다. 철저한 무저항 속에서 순사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톨스토이와 간디의 평화주의다. 또한 예수의 하느님 아들 정신이요, 석가의 붓다 정신이다.

톨스토이가 <부활>을 쓴 데는 까닭이 있었다. 러시아에 있는 두호보르파 기독교도들을 캐나다로 이주시키려 한 것이다. 두호보르파는 원시 기독교의 교의를 엄수하고자 하여 철저한 무저항주의와 사해동포주의를 실천하려 하였다. 톨스토이도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이 넘치는 무정부주의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를 자처하지는 않았다. 

류영모는 톨스토이, 간디, 소로와 같이 적게 다스리는 정보, 나아가 안 다스리는 정보를 이상으로 여겼다.

552 함석헌의 제자 홍명순은 평화 정신을 지키기 위해 병역 의무를 거부하였다. 함석헌은 홍명순의 반전 평화 정신을 높이 샀다. 재판정에도 참석하고 면회도 하러 갔다. "서로가 동포라고 하면서 같이 총칼을 들었지 어느 한 사람도 팔을 벌려 '들어오너라, 너를 대항해 죽이기보다는 나는 차라리 네 칼에 죽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땅이 소원이면 가져라. 물자가 목적이면 맘대로 해라. 정권이 쥐고 싶어 그런다면 그대로 하려무나. 내가 그것을 너와야 바꾸겠느냐, 참과야 바꾸겠느냐'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대항하지 않으면 그저 살겠다고 도망을 쳤을 뿐이다."(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서완근은 스승 류영모를 찾아가 어찌하면 좋을지 물어보았다. "많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그 은혜를 몰라서는 안 돼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이 평화 정신 못지 않게 중요해요. 전선에 나가 싸우다가 전사할 줄도 알아야 해요."

572 로맹 롤랑은 이렇게 말하였다. "... 형제들이여 우리 서로 가깝게 지내자. 우리를 떼어놓은 원인을 잊자. 우리들 전부의 고통과 비참함만을 생각하자. 적도 없고 악인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불쌍한 사람들뿐이다. 그리고 영속적인 유일한 행복은 우리들이 서로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지와 사랑, 오직 이것만이 삶의 앞뒤에 있는 두 개의 심연 사이에서 우리의 암흑을 비춰주는 유일한 광명이다."(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 서문)

573 류영모가 말하기를 몸은 비눗방울이라 언제 터져서 없어져버릴지 모른다고 하였다."제법 이 거죽(몸)이 70년, 80년 가는데 비눗방울 같은 것입니다. 불경에서 몸이란 거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70년, 80년 간다 하여도 형편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떠날 때는 마음이 시원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직 준비가 못 된 것입니다. 하지 않을 것에다 삶을 의지했기 때문에 죽을 때 시원하지 못합니다.
언짢고 좋고가 없는데 모두가 이 시험에서 헤어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살기는 좋고 죽음은 생각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두 번 미혹입니다. 또 죽으려고 하는 것은 어림없는 미혹입니다. 한 10년 더 살았다고 늙은이 행세를 하고 오래 산 것을 자랑하는데 얼마 더 산 것이 길게 산 것일까요? 어림없는 생각입니다. 뜰 때 떠야 하므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남은 떠날 준비를 다하여 떠나는데 자기만 남아서 무엇을 자랑해요? 늙은이 주책만 남습니다.

613 목사라는 호칭을 듣게 된 김흥호에게 어찌 서운한 생각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류영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흥호는 비록 교목이 되어 목사라는 호칭으로 불렸으나 그 사상에는 아무런 달라짐이 없었다.
김흥호는 버클리대학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왔다. 이것은 류영모의 종교 사상이 미국의 종교 다원주의보다 70년 앞섰다는 정양모의 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김흥호의 일요 모임에 나가서 그의 강의를 듣는 김동연이 이런 말을 하였다. "요즘 나는 <전습록>과 요한복음을 김흥호 선생님께 배운다. ... 어느 해 말에 수학하는 사람들이 촌지를 모아 김흥호 선생님께 드렸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물질이 가로놓이면 사제 간에 열린 도(道)가 막힌다.'고 하였다." 김흥호의 인품을 짐작케 하는 말이다.

620 목사요, 아동 문학가인 황광은은 현동완을 기리는 추모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창주가 커피를 안 마신 것은 나라를 위함이요, 고기를 안 먹은 것은 세계 평화를 위함이었다. 하루에 한 끼씩 안 먹은 것은 불행한 고아를 위함이요, 사과를 안 먹은 것은 병자를 생각함에서였다. 창주는 두 벌 옷이 없었다. 그는 불우한 형제에게 나누어주느라 두 벌 옷이 없었다. 창주는 머리 둘 집이 없었다. 보육원인 난지도 소년촌 단칸방을 병실로 쓰다가 그곳에서 숨졌다. ..."

창의적인 새로운 말씀보다 되풀이 되는 말씀이 많으면 정신적인 침체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는 정신적인 향상이 없으면 모임은 아무런 뜻이 없다고 말하였다.

한 달 만에 우리가 만났는데 그저 만나서는 싱거운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서 해결된 어떤 문제가 있으면 이를 증거하거나 또는 의심이 생겼으면 그것을 서로 주고받는 데 의의가 있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한을 잘못 쓰면 죄악입니다. 유한한 시간을 팽팽한 긴장으로 보낸다면 영구히 후회하지 않습니다. 게으르게 멍청하게 있다가 어디 가서 말 한마디 하려면 머리가 멍해 말도 못 하는 그런 지경에 가서는 안 됩니다.

630 서울로 도시로 모이는 것은 빛깔(色)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산촌 어촌으로 가는 것은 빔(空, 하느님)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빔처럼 높고 밝고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허공 같은 마음이 제일 좋습니다. 허공은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건덕지는 더러운 것입니다. 사람은 더러운 것, 자연은 청정한 것입니다.

639 첫째, 몸성히, 둘째, 맘놓이, 셋째 뜻태우.

몸성히를 위해서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자꾸 먹고 싶은 욕심을 경계하고 많이 먹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점심(點心)이라고 합니다. 하루 한 끼만 먹으면 온갖 병이 없어집니다. 모든 병은 입으로 들어갑니다. 감당 못할 음식을 너무 집어넣기 때문에 병이 납니다.

맘놓이를 하려면 치정(癡情)을 끊는 것입니다. 정조(貞操)라고 하지만 참으로 정조를 지키는 것은 아주 치정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남녀 관계를 끊으면 마음은 저절로 가라앉습니다. 석가가 앉아 있는 것을 선정(禪定)이라고 합니다. 석가가 언제나 곧이 곧장 앉아 있는 것도 치정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뜻태우는 지혜의 빛입니다. 광명이란 직관력을 말합니다. 만물을 직관하여 볼 수 있는 힘입니다. 이 정신의 광명을 흐리게 하는 것이 진에(瞋恚)입니다. 불만의 성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현이 머무는 세계는 성령이 충만하고 광명이 넘치는 얼의 세계입니다. 샘물이 차별 없이 만물을 살려 가듯이 성현의 지혜는 일체를 살려내는 생명의 불입니다. 뜻을 태워(연소) 만인을 살리는데 성을 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탐욕을 버리고 치정을 버리고 진에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와 석가는 아주 가깝게 비슷하다는 진리관과 살고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명관

젊었을 때의 참 신앙은 어렵지, 어려워요. 참 어렵고말고. 젊었을 때 깨달았다는 것도 안다는 것도 다 껍데기지요. 젊었을 때 동서고금의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나 선지자를 믿는 게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 속에 보내신 이(얼나)를 믿는 것이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불성이 자기에게 있음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내 속에 하느님의 아들(얼나)이 와 있음을 믿는 것이다.
내 속에 오신 하느님밖에 예수나 미륵불을 기다리지 마라. 그것은 헛일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오시는 분이다. 마침내 생명의 원체인 절대를 이루는 것이다.

645 하늘(하느님)은 내버리고 땅(아내)만 움켜잡으려고 합니다. 올라가는 것은 집어치우고 가로로만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땅에 붙어서 누워 사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살림은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완전에 도달하면 결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온전함이 능히 독신을 가능케 합니다.

"나는 투명한 눈동자(얼나)가 되었다. 제나는 없어졌다. 나는 전체의 기운이 나를 통하여 순환되었다. 나는 하느님의 긋(부분)이 되었다. 가장 가까운 벗들의 이름이 낯설거나 아무렇지 않게 들리었다. 그때 형제니 아는 이니 하는 것이 시시하고 귀찮아졌다. 나는 순수하고 영원한 아름다움(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에머슨, <수상록> '자연')

"모든 타성과 미련을 빚어내어 살 길보다 죽을 길로 통하게 되기 쉬운 데가 집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 8:20) 하신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저문 날 혼자 산으로 가셨다 함이 두렵고 그립삽나이다." (1942년 성서조선)

톨스토이는 아내에게 이러한 편지를 남겼다. " ... 나는 오래 전부터 내가 하고자 생각했던 일을 하려고 결심하였소. 그것은 집을 나가는 일이오. 인도 사람은 나이 60이 되면 숲 속으로 가버리거니와 그와 마찬가지로 종교를 가진 노인은 누구나 만년에는 농담이나, 화투치기나, 영화나, 공치기 등이 아니고 하느님에게 바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

650 빛나려면 깨(覺)야지, 깨(破)져야지, 죽어야지.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하고 죽는 거야. 그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입니다.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러 온 것입니다. 나는 죽으로 온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죽기 위해 나온 건데 그걸 뻔히 알면서 "죽긴 왜 죽어" 하고는 잡아떼지만 그게 말이 됩니까? 안 죽는 것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목숨은 끊이 말씀 깨끗' 이것이 인생입니다. 목숨은 한 번은 끊어져야 다시 이어집니다. 말씀은 깨끗 끝까지 깨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란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아무 때나 죽어도 좋습니다. 내 속에 벌써 영원한 생명이 깃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밥 먹고, 똥 누고 하는 이 일을 얼마 더 보고자 애쓰는 것은 참 우스운 일입니다.

651 가정을 초월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가정은 수성의 소산이요 수성의 아성(牙城)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 김효정을 소박하거나 박대한 일은 없었다. 호의호식을 시킨다거나 금은보석을 사준다거나 함께 명승고적을 관광한다거나 연극 영화를 관람한다거나 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끔찍이 아꼈다.

어버이는 아기가 자랄 때 3-4살 까지는 똥오줌을 가려준다. 자녀도 어버이가 돌아갈 때 3-4년은 똥오줌을 가려드려야 품앗이를 갚는 것이 된다. 효도는 못 하더라도 품앗이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노쇠하고 병약하여 출입도 못하고 혼자 일어나지도 눕지도 못하는데, 그리고 다 갓난아기 때처럼 다시 똥오줌을 혼자서 못 가리게 되었는데 이제 무엇을 보람으로 사오리까. 여러 젊은이들이여 몸의 마지막 길은 이러하니라. 이제 병상에 누운 나를 보라. 나는 어제까지는 육신으로 자유롭게 거저 출입을 하였느니라. 이제 나는 하늘나라 문전에서 그대들과 이별의 말을 나누고자 하노라. (타고르, 기탄잘리)

사람의 몸이 죽으면 어때요? 죽을 때 좀 고통스러우면 어때요? 하느님 아버지께 가기만 하면 되지요. 우리가 왜 죽을 것을 겁내요? 빚(몸)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빚이란 죄입니다. 빚은 갚아버리고 원대한 하나(絶對)에 참여하면 군색할 것 하나도 없어요. 원대한 하나에 합쳐야 해요. 못 합쳐지니까 문제가 생기지요. 원대한 하나에 합쳐지는 게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665 사람이 말씀을 믿지 않으면 종당은 손잡고 입 맞추고 알싸안던 것을 마지막 거두어 씻기어 널에 넣어 흙 속에 던지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세운 오리목에 글자 몇 자 써다가 불사르면 재 한 줌이나 될까. 그 무슨 노릇이야. 인생에서 말씀(진리)을 빼면 재 한 줌밖에 될 것이 없습니다. 결국 사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흙 한 줌, 재 한 줌이 참나가 아닙니다. 우주를 통째로 싸고 있는 호연지기가 참나입니다. 그것은 지강지대(至剛至大)하여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무엇도 견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참나입니다.